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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없어도 사랑은 있어도

픽션 사극 로맨스

by 라한

북소리가 멎었다. 하늘의 경고라 불리던 거대한 울림은 피에 젖은 가죽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비명조차 삼켜버렸다. 한 나라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바람이 스몄다. 차가운 칼날이 제 살을 파고드는 감각보다 그 칼을 쥔 자의 손아귀가 더 시렸다.


“아… 버님….”


공주는 자신을 꿰뚫은 검을 쥔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왕의 눈에는 딸을 향한 연민 대신 무너진 조국에 대한 절망과 배신당한 왕의 분노만이 가득했다.


고통보다 먼저 사무친 것은 배신감이었다. 머릿속에 그 이름 하나가 핏물과 함께 심장에서 역류했다. 그가 조국을 택했음을 그리고 자신을 기만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나를 이용한 것이었습니까.’


귓가에 쟁쟁한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달콤했던 그 약조가 이제는 독이 되어 심장을 태웠다.


‘이 옥피리를 불면 하늘 끝에 있어도 그대에게 달려가겠소.’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품속의 옥피리를 꺼냈다. 진실을 묻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흐려지는 숨을 몰아쉬며 피리를 입술에 가져갔다.


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후 하고 내뱉은 숨은 붉은 피거품이 되어 피리의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때였다. 무너진 성문 사이로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그가 이국의 왕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갑옷은 찢기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분명 그였다.


“안 돼! 안 된다! 눈을 떠!”


자신을 보며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거짓말. 이제 와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거짓말쟁이.


늦었다.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독하게 원망하고 있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옥피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쨍 하는 맑은 파열음과 함께 두 조각으로 깨졌다. 그녀의 절망을 본 왕자 역시 기꺼이 아비가 내린 독이 든 잔을 들었다. 사랑은 그리움이 되지 못하고 천 년을 썩어 문드러질 지독한 원망이 되었다.


천 년의 세월이 겹쳐 쌓인 927년의 서라벌은 불타고 있었다. 밤하늘을 붉게 물들인 화염이 멸망해가는 신라의 마지막 숨통을 조였다. 연기는 매캐했고 살이 타는 냄새가 비명과 뒤섞여 역하게 흘러넘쳤다. 재가 섞인 바람이 살아남은 자들의 얼굴을 거칠게 할퀴었다.


신라의 궁녀 은랑은 찢어진 치맛자락을 동여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가녀린 몸으로는 감당하기 버거운 검이 들려 있었다. 왕 경애왕이 피신한 포석정으로 향하는 길목은 이미 후백제 군사들의 시신과 신라 궁병들의 피로 질척였다.


은랑은 숨을 몰아쉬었다. 연기를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목이 찢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저 멀리서 울리는 후백제의 진군고 소리였다. 둥 둥 하고 심장을 울리는 그 북소리. 전쟁터의 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슬픔에 휩싸였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그녀는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의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너지지 마라. 나는 신라의 마지막 궁녀다. 전하를 지켜야 한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궁병들을 독려하며 포석정의 입구를 막아섰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밀려오는 파도 앞에 쌓은 모래성일 뿐이었다.


“모두 죽여라! 신라 왕을 찾아라!”


야수와 같은 고함이 고막을 찢었다. 불길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달빛에 젖은 그의 갑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감정도 없었다. 마치 눈밭을 홀로 걷는 그림자 같았다. 후백제의 선봉장 설영이었다.


그는 이 소란이 지긋지긋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도 살려달라 애원하는 비명도 무감각했다. 그의 칼은 이미 수십의 목을 베어 낸 뒤였다. 다만 둥 둥 하고 울리는 아군의 북소리가 승전의 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유 없이 그의 관자놀이를 찔러왔다. 또 시작이군. 이 지독한 두통은 전장에 설 때마다 그를 괴롭혔다. 마치 머릿속에서 누군가 거대한 북을 울려대는 듯했다. 그는 이마를 짚는 대신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비켜라.”


설영은 앞을 가로막는 마지막 저항을 향해 무심하게 검을 겨누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가 내딛는 눈발처럼 차가웠다. 은랑은 그의 목소리에 그리고 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불꽃이 두 사람의 시선 사이에서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녀의 동료들이 그의 칼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은랑 그녀 하나였다. 그녀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지만 왕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검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더 이상은… 못 간다 이 역적 놈!”


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여인의 처절한 저항을 비웃듯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쨍그랑 하는 쇳소리와 함께 은랑의 검이 부러지며 저 멀리 날아갔다.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이 끝났다.


설영은 무심하게 그녀의 목을 베기 위해 검을 들어 올렸다. 그의 임무였다. 저항하는 자는 모두 죽인다.


그때였다. 그는 여인의 눈을 보았다. 죽음을 앞둔 공포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지독한 원망과… 그리고 그 원망보다 더 깊은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긴 눈동자.


쿵. 머릿속의 북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단단했던 얼음벽에 금이 가듯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졌다.


‘이 눈은….’


설영의 손이 수천의 목을 베면서도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던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죄책감이 마치 천 년 묵은 빚처럼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검을 내리칠 수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견딜 수 없었다.


‘왜… 망설이는 거지? 베어라. 지금 당장.’


하지만 그의 몸은 명령을 듣지 않았다. 그의 검이 생전 처음으로 망설였다.


은랑 역시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실눈을 떴을 때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냉혹해야 할 정복자의 얼굴. 하지만 그는 그녀가 상상했던 그 어떤 표정보다도 더 깊은 고통과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은랑을 지배했던 공포와 분노가 마치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슬픔과 배신감이 차올랐다. ‘왜… 내가 슬프지?’ 이 자는 원수다. 내 조국을 짓밟고 내 동료들을 죽인 원수다. 그런데 왜 그가 나를 베지 않는 이 순간이 검에 찔리는 것보다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걸까. 마치 아주 오래전에도 그가 자신을 이렇게 실망시킨 적이 있었던 것처럼.


“장군! 왕은 포석정에 있습니다! 견훤 대왕께서 찾으십니다!”


부하의 다급한 외침이 두 사람 사이의 기묘한 정적을 깨뜨렸다. 설영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의 망설임을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들킨 것만 같아 치욕스러웠다. 그는 이 혼란의 원인을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검을 내리치는 대신 그는 검의 손잡이로 은랑의 목덜미를 강하게 내리쳤다.


“큭…!”


은랑은 짧은 신음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영은 쓰러지는 여인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자신의 떨림을 애써 감추었다. 그때 그녀의 품속에서 무언가 굴러나와 달빛에 반짝였다. 깨진 옥 조각이었다.


설영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옥 조각이 손아귀에 닿는 순간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동시에 가슴을 짓누르던 죄책감은 더욱 깊어졌다.


‘이것은… 대체….’


“장군!”


“가고 있다.”


설영은 부하의 재촉에 거칠게 대답했다. 그는 깨진 옥 조각을 제 품속에 깊숙이 넣었다. 쓰러진 은랑을 향해 그는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계집은 죽이지 마라. 신라 왕의 마지막 궁녀다.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끌고 가라.”


‘그래 심문을 위해서다. 결코… 다른 이유는 없다.’


그는 자신의 망설임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낸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불타는 포석정을 향해 걸어갔다. 차가운 흙바닥에 쓰러진 은랑은 천 년 전과 똑같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긴 채 그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포석정의 연회는 이미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흐트러진 비단과 엎질러진 술잔 사이로 붉은 피가 수로를 따라 흐르며 잔을 채우고 있었다. 후백제의 왕 견훤은 피로 물든 연회장 한가운데에 앉아 덜덜 떠는 신라의 왕 경애왕을 비웃었다.


“신라의 왕이여. 그대의 춤사위가 퍽 볼만하다 들었소. 어찌 멈추었는가.”


경애왕은 치욕에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설영은 그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품속에 넣은 옥 조각이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그의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지끈거리던 두통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채운 알 수 없는 죄책감이 그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때 후백제 병사들이 의식을 차린 은랑을 거칠게 끌고 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무릎이 꿇렸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마지막 왕이 역적의 발치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그 역적의 곁에 자신을 기절시켰던 그 장수 설영이 그림자처럼 서 있는 모습을.


은랑의 시선이 설영에게 꽂혔다. 그녀는 그를 보자 다시금 가슴을 짓누르는 그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왜… 저 자를 보면 이리도 가슴이 아린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 감정을 증오로 덮어버리려 애썼다.


설영은 그녀의 시선을 느꼈지만 애써 외면했다. 저 계집의 눈을 보면 또다시 그 '이상한'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견훤이 경멸이 가득한 시선으로 은랑을 훑어보았다.


“저 계집이 마지막까지 검을 들던 년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기백이 가상하군.”


견훤은 술잔을 들어 바닥에 내던졌다.


“허나 쓸모없는 기백이지. 망해가는 나라에 바치는 충심만큼 어리석은 것이 없으니.”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경애왕을 발로 걷어찼다. 그리고 연회장에 모인 신라의 잔당들과 포로들을 향해 외쳤다.


“신라의 개들아 똑똑히 보아라! 천 년을 이어온 너희의 나라가 오늘 어찌 끝나는지!”


견훤은 칼을 뽑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주 오래전 나의 조상 위대한 백제는! 너희 신라의 간악한 계략에 무너졌다! 너희가 저 바다 건너 당나라 오랑캐 놈들을 끌어들여 나의 조국을 짓밟고 수십만 백제인의 피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한이 서려 있었다.


“나는 그날을 잊은 적이 없다. 구백 년이다. 구백 년의 세월 동안 백제의 원혼들이 이 서라벌을 향해 울부짖었다! 오늘 나는 그 구백 년의 복수를 하러 이 자리에 섰다! 이것은 백제의 복수다!”


복수. 그 단어가 포석정의 피비린내 나는 공기 속에 무겁게 울려 퍼졌다.


그 단어가 은랑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복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간 선명해졌다. 그녀의 눈이 자신도 모르게 설영을 향했다. 그녀를 사로잡고 있던 '이상한 슬픔'이 그 순간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증오'로 변해갔다.


‘복수….’


그녀는 왜인지 몰랐다. 하지만 견훤의 저 외침이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품어왔던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설영을 노려보았다.


‘그래… 복수해야 해….’


누구에게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본능만이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같은 순간 설영 역시 그 단어를 들었다. 복수. 그는 자신의 왕 견훤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의무이자 대의. 백제의 복수. 그는 그것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자석에 이끌린 듯 은랑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이 아까와는 다른 서늘한 살의로 불타는 것을 보았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설영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가슴을 짓누르던 죄책감이 '복수'라는 단어와 함께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복수….’


아주 먼 기억의 편린이 스쳤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여인. 찢어지는 북소리. 깨진 옥피리. 그리고… 자신을 원망하던 그 눈빛.


‘내가… 복수를 당한 것인가. 아니면….’


그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이다. 그는 품속의 옥 조각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견훤은 두 사람의 미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한 채 혹은 그 모든 것을 즐기기라도 하듯 웃었다.


“설영 장군.”


“명을 받들겠습니다.”


“저 계집의 눈빛이 마음에 드는군. 신라의 마지막 충심인가.”


견훤은 설영을 향해 잔인하게 미소 지었다.


“그대의 칼에 망설임이 깃든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는가. 그 여인을 그대가 직접 맡아라. 저 기둥에 묶고 그 눈으로 신라의 왕이 어찌 죽어가는지 똑똑히 지켜보게 해.”


그것은 명령이자 시험이었다.


“…….”


설영은 망설일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견훤에게 완벽한 충성을 증명해야 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설영은 은랑에게 다가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아 일으켰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방금 각인된 '복수'라는 본능적인 살의 때문이었다.


은랑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려 발버둥 쳤다.


“이 손 놓아라! 더러운 역적의 손으로 감히 나를…!”


“시끄럽다.”


설영이 그녀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그의 숨결이 닿는 것만으로도 은랑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게냐. 네년의 눈빛이 나를 흔들고 있다.’


그는 자신의 혼란을 감추려 그녀를 더욱 거칠게 연회장이 한눈에 보이는 기둥에 밀쳤다. 그가 그녀를 포박하기 위해 밧줄을 가져왔을 때 은랑이 그를 향해 침을 뱉었다.


“네놈이… 내 왕에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내가 죽어서도 네놈을…!”


“죽어서?”


설영은 그녀의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워졌다. 설영은 그녀의 불타는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견훤에게서도 부하들에게서도 벗어나 오직 이 '이상한' 여인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나를 아는가.”


은랑은 그의 질문에 잠시 숨을 멈췄다. 아는가? 모른다. 오늘 처음 본 원수다. 그런데 왜.


‘…아는 것 같다.’


그녀는 대답 대신 그를 더욱 지독하게 노려보았다.


설영은 그녀의 침묵에서 대답을 읽었다. 그는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는 밧줄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읍…!”


“죽이는 것은 내가 결정한다. 그 입을 다물고 그저 보아라. 네가 말하는 그 '복수'라는 것이 오늘 여기서 어떻게 완성되는지를.”


그는 그녀를 기둥에 단단히 포박했다. 품속의 옥 조각이 그녀의 눈빛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다. 두 사람은 천 년 전과 똑같이 서로에게 가장 잔인한 모습으로 엮이기 시작했다.


설영은 은랑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견훤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의 등 뒤로 기둥에 묶인 은랑의 거친 숨소리와 밧줄을 풀어내려는 부질없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그녀의 입은 막혔지만 불타는 두 눈은 그 어떤 비명보다도 시끄럽게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견훤 폐하께서… 나를 시험하고 계신다.’


설영은 애써 은랑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저 계집의 눈을 더 이상 보아서는 안 된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을 짓누르는 이 알 수 없는 죄책감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지금 백제의 복수를 완수하는 중이었다.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며 신라의 왕 경애왕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견훤은 그런 설영의 굳은 표정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경애왕을 향해 몸을 돌렸다. 연회장은 이제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살아남은 신라의 신하들은 모두 고개를 처박고 왕의 마지막을 외면하고 있었다. 오직 은랑만이 눈을 부릅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 신라의 왕이여.”


견훤의 목소리가 피에 젖은 수로를 타고 낮게 울렸다.


“그대의 조상들이 나의 조상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대에게도 선택지를 주겠다. 내 칼에 더럽게 죽을 것인가 아니면 왕으로서 그대 스스로 명예를 지킬 것인가.”


그것은 자결을 강요하는 가장 잔인한 자비였다.


경애왕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후백제의 장수들을 보았다. 그리고 저 멀리 기둥에 묶여 자신을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고 있는 마지막 궁녀 은랑을 보았다.


“으읍! 으읍!”


은랑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안 된다고 그렇게 가시면 안 된다고 그녀의 온몸이 절규하고 있었다.


경애왕은 은랑을 보며 피눈물이 섞인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체념이자 마지막 충심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견훤을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하겠다.”


모든 것을 포기한 왕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견훤은 손짓했다. 한 병사가 비단으로 짠 흰 천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경애왕은 그 흰 천을 받아 들었다. 그는 무너진 서라벌의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천천히 자신의 목에 그 천을 감았다.


“전하…! 으읍 으읍!”


은랑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졌다. 그녀의 눈에서 마침내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 자신의 조국 자신의 왕이 바로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을 포박한 저 남자 설영이 바로 곁에서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천이 경애왕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다 이내 창백하게 질려갔다. 꺽 꺽 하는 마지막 숨소리가 포석정의 물소리에 섞여들었다. 마침내 경애왕의 몸이 축 늘어졌다.


신라의 마지막 왕이 그렇게 허무하게 스러졌다.


은랑의 몸부림이 뚝 하고 멎었다. 그녀의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숨이 끊어진 왕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녀의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 묶인 밧줄에 몸을 기댄 채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타오르던 증오도 슬픔도 모두 재가 되어버린 듯했다. 오직 텅 빈 눈동자만이 죽은 왕을 향해 열려 있었다.


“와아아아! 백제 만세! 대왕 폐하 만세!”


후백제의 병사들이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그 함성 소리에 설영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왕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왕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내내 은랑을 보고 있었다.


저항하던 여인이 절규하던 여인이 순식간에 부서져 내리는 그 모든 과정을. 그녀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는 그 순간을 그는 똑똑히 목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품속에 있던 깨진 옥 조각이 마치 불에 달군 쇠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큭…!”


설영은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끈거리던 두통이 아니었다. 심장이 마치 거대한 손에 움켜쥐어진 듯 으스러지는 고통이었다.


‘이 고통은….’


그는 고통 속에서 은랑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버린 그녀의 눈. 그녀가 흘리는 눈물.


‘…이것은 죄책감이다.’


아주 먼 기억의 편린이 안개 속에서 번개처럼 스쳤다. 피를 흘리며 자신을 원망하던 여인의 눈동자. 찢어지는 북소리. 그리고… 깨져버린 옥피리.


‘이 감각… 이 절망….’


그는 숨을 헐떡였다.


‘마치… 내가 저 여인의 눈물을 아주 오래전에도 본 적이 있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왜 이 여인의 절망에 이토록 고통스러워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견훤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두드렸다.


“보았는가 설영 장군! 이것이 신라의 끝이다! 이것이 우리가 원했던 백제의 복수다!”


복수. 그 단어가 다시 한번 설영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고통을 애써 억누르며 견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


“하하하! 이제 이 서라벌은 우리의 것이다! 저 계집의 눈을 보아라. 저것이 패배한 자의 얼굴이다.”


설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은랑을 보았다. 그녀 역시 어느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 있던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천 년을 묵혀두었던 지독하고도 시린 증오였다. 그녀의 눈은 마치 죽은 왕의 혼을 빨아들인 듯 설영 그 자신을 향한 복수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은랑은 입이 막힌 채였지만 그녀의 입모양이 정확하게 움직였다. 죽여버리겠어. 너를.


설영은 그 입모양을 똑똑히 읽었다.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태우는 옥 조각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직감했다.


자신과 이 여인의 엮임은 이제 막 다시 시작되었을 뿐이라는 것을.


승리의 함성은 밤이 깊어지도록 멎지 않았다. 견훤은 신라의 왕궁을 차지하고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하는 대신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 패배한 왕의 마지막을 만천하에 보란 듯이 전시하려는 잔인한 의도였다. 후백제의 병사들은 서라벌 곳곳을 약탈했고 포석정의 연회는 이제 정복자들의 잔치가 되었다.


설영은 그 소란스러운 무리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견훤의 명에 따라 은랑을 임시 감옥으로 만들어진 궁의 한 창고로 끌고 왔다. 시끄러운 잔치 소리와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인들의 비명 소리가 창고의 얇은 문을 뚫고 들어왔다.


창고 안은 썩은 짚 냄새와 먼지로 가득했다. 설영은 횃불을 벽에 꽂고는 묶여 있는 은랑을 구석으로 거칠게 밀쳤다. 그녀는 짚단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읍! 읍…!”


그제야 설영은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던 천을 풀어주었다. 자유로워진 입으로 은랑은 숨을 몰아쉬는 대신 독기 서린 숨을 그대로 내뱉었다.


“하… 하아… 이… 살인자.”


그녀의 목소리는 왕의 죽음을 목격한 충격으로 모래처럼 갈라져 있었다. 설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횃불 곁에 서서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신라 병사들의 피인지 아니면 조금 전 그녀의 팔목을 잡았을 때 묻어난 그녀의 피인지 알 수 없었다.


은랑은 짚단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손은 뒤로 묶인 채였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어둠 속에 반쯤 잠긴 설영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그저 원수가 아니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였다.


‘왜… 나를 살려둔 거지?’


분명 망설였다. 자신을 베려던 그 순간 그의 칼은 분명히 망설였다. 그리고 자신을 기절시켰고 옥 조각을 빼앗아 갔다.


‘내 옥 조각….’


그것은 그녀가 아주 어릴 적부터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부적처럼 품고 다니던 것이었다. 그것을 만질 때마다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에 휩싸이곤 했다. 그런데 저 자가 그것을 가져갔다. 마치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다는 듯이.


“내… 옥 조각… 돌려줘….”


설영은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횃불 빛이 그의 냉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품속에서 깨진 옥 조각을 꺼내 들었다.


“이것 말인가.”


“그건… 내 것이야…!”


“네 것이라고?”


설영은 옥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관찰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것을 쥔 이후로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사라졌다. 대신 심장을 짓누르는 이 무거운 죄책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치 이 옥 조각이 그의 고통을 잠재우는 대신 그의 감정을 흔들고 있는 듯했다.


그는 은랑을 바라보았다.


“이것을 보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가.”


은랑은 그의 질문에 숨이 멎는 듯했다. 생각나는 것? 그것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안개처럼 흐릿한 꿈이었다.


‘…피리를 부는 남자. 약속. 그리고… 배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네놈이 알 바 아니야. 그건 내 어머니의 유품이다! 당장 돌려줘!”


그녀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남자에게만큼은 이 옥 조각에 얽힌 자신의 혼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설영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옥 조각을 다시 자신의 품속으로 넣었다.


“이것은 내가 갖겠다.”


“네놈이 감히!”


“이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때까지. 그리고… 네가 누군지 알아낼 때까지.”


설영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은랑은 자신도 모르게 벽 쪽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그는 쪼그려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는 나를 안다고 했다.”


아까의 그 질문이었다. 은랑은 이를 악물었다.


“안다. 내 왕을 시해하고 내 조국을 짓밟은 원수. 후백제의 개. 그것이 너다.”


“아니.”


설영이 낮게 읊조렸다.


“그것 말고.”


그의 눈빛은 아까의 냉혹한 장수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천 년의 세월을 헤매는 미아처럼 깊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네가 처음 나를 보았을 때. 네가 나를 찌르려 했을 때. 네 눈은…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원망해 온 사람 같았다.”


“…….”


“왜지?”


그는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너를 처음 본다. 그런데 왜… 나는 너를 베지 못했는가. 왜 네 눈을 보면 내 심장이 이리도 무겁게 가라앉는 거지. 왜 이 옥 조각이… 내 고통을 잠재우는 것이냐.”


은랑은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 보았다. 이 남자도 자신과 같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원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은랑은 이 남자 역시 무언가에 갇혀 있음을 직감했다.


‘이 사람도… 무언가를 잃어버렸어.’


그때였다. 창고 밖에서 거친 발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견훤의 명을 따르는 다른 장수 '상귀'였다. 그는 술에 취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설영 장군!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상귀는 설영을 부르러 왔다가 구석에 묶여 있는 은랑을 발견했다. 그의 눈빛이 음흉하게 빛났다.


“오호. 이 계집이 아까 그 독사 같은 년이군. 폐하께서 장군께 맡기셨다더니… 따로 심문이라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설영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다시 얼음장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깊은 혼란을 상귀에게 들킨 것만 같아 불쾌했다.


“내 소관이다. 폐하께는 곧 간다고 전해라.”


“에이 그러지 마시고.”


상귀는 비틀거리며 은랑에게 다가갔다.


“이런 전리품은 다 같이 즐겨야 하는 것 아닙니까. 신라의 마지막 궁녀라… 맛이 아주 좋을 것 같은데.”


상귀가 더러운 손을 뻗어 은랑의 턱을 잡으려 했다. 은랑은 경멸감에 고개를 돌리며 그의 손을 피했다.


“이거 놓…!”


“어딜 감히!”


상귀가 화를 내며 그녀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은랑의 고개가 돌아가고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설영의 검이 번개처럼 뽑혀 나와 상귀의 목 바로 앞에서 멈췄다. 차가운 칼날이 상귀의 목 피부를 살짝 베어 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상귀는 숨이 멎은 채 얼어붙었다. 술이 확 깨는 듯했다.


“서… 설영 장군… 지금….”


설영의 눈은 아까 은랑이 자신을 바라보던 그 살의로 불타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차가웠다.


“그 손 치워라.”


“아니… 나는 그저… 폐하의 명으로….”


“내가 맡으라 하셨다. 내 심문이 끝나기 전까지 그 누구도 이 계집에게 손댈 수 없다.”


설영은 상귀를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꺼져라.”


상귀는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영의 무공과 잔인함은 후백제 군내에서도 유명했다. 그는 뒷걸음질 치며 황급히 창고를 빠져나갔다.


“두고 보세… 폐하께 이 사실을…!”


문이 닫히고 창고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설영은 검을 칼집에 넣지 않은 채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의 등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저 계집을 감싼 거지?’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단지 심문할 포로일 뿐이다. 상귀의 말대로 전리품일 뿐인데.’


하지만 그는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다른 답이 있음을 알았다.


‘아니야. 저 계집은… 무언가 알아. 내 고통과… 이 옥 조각에 대해….’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인 명분을 찾으려 애썼다.


은랑은 뺨을 맞은 고통보다 방금 일어난 일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왕을 죽게 만든 원수. 자신을 포박하고 옥 조각을 빼앗아 간 남자. 그 남자가 지금 자신을 지켰다.


그녀는 터진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피 맛을 느끼며 혼란스러운 눈으로 설영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등은 아주 오래전 자신이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누군가의 등처럼… 이상하게도 낯설지가 않았다. 그녀는 이 위험한 감정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원수다. 저 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원수다.


설영은 한참이나 문을 노려보고 서 있다가 마침내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철컥.’ 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기묘한 정적을 갈랐다. 그는 은랑을 돌아보지 않았다.


“쓸데없는 짓 마라.”


그의 목소리는 다시 원래의 냉혹함을 되찾아 있었다.


“나는 널 살려둘 이유가 아직 없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그는 그녀에게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행동이 변덕이나 동정심이 아님을 확인시키려는 듯 더욱 차갑게 굴었다. 그는 창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던 마른 밧줄을 하나 더 가져왔다. 그리고는 은랑에게 다가가 그녀의 발목마저 묶어버렸다.


“읍…!”


은랑이 반항하려 했으나 뺨을 맞은 충격과 묶인 손 때문에 저항할 수 없었다. 설영은 그녀의 발목을 묶으며 아까 상귀가 때린 탓에 붉게 부어오른 그녀의 뺨을 보았다. 그는 다시금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밧줄을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아…!”


은랑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얌전히 있어라. 네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는 밧줄의 매듭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일어섰다. 그는 횃불을 벽에서 뽑아 들었다.


“폐하를 뵙고 오겠다. 그동안 네가 아는 것을 생각해 두어라. 그 옥 조각의 정체 그리고… 네가 나를 아는 이유를.”


그는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혹은 자신의 혼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그대로 창고를 나섰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창고 안은 다시 완벽한 어둠에 잠겼다. 은랑은 차가운 바닥에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뺨은 뜨겁게 불타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방금 전 자신을 지키던 설영의 모습과 그녀를 꿰뚫어 보던 그의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대체….’


그녀는 어둠 속에서 터진 입술을 깨물었다. 그 어떤 고문보다도 저 남자가 주는 알 수 없는 혼란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설영은 차가운 밤바람 속을 걸었다. 창고의 무거운 철문이 그의 등 뒤에서 닫히자 그는 비로소 참아왔던 거친 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남겨졌던 것은 그녀였지만 정작 고립된 것은 자신인 듯했다.


손바닥이 아직도 떨려왔다. 상귀의 목에 검을 겨누었던 그 순간의 제어할 수 없었던 분노. 그것은 왕의 명을 거역하는 부하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원초적이고 지독한 무언가였다.


‘내가… 왜 그랬지?’


그는 걸음을 멈추고 굳게 주먹을 쥐었다. 품속의 옥 조각이 그의 가슴을 찔렀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멀리서 새어 나오는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차가운 옥. 하지만 이것을 쥐고 있으면 그를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가라앉았다. 마치 울부짖는 짐승을 잠재우는 유일한 재갈처럼.


‘이것이… 나를 흔들고 있는 것인가.’


그는 이 옥 조각이 그녀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이것은 이제 그의 것이다. 그의 고통을 잠재울 유일한 물건. 그리고 저 계집은 이 물건의 비밀을 풀 유일한 열쇠다.


‘그래. 나는 그녀가 필요하다.’


설영은 그렇게 결론 내렸다. 자신이 그녀를 지킨 것은 감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쓸모’ 때문이었다.


‘저 계집은 죽여선 안 돼. 적어도… 이 비밀을 알아낼 때까지는.’


그는 그렇게 자신의 행동에 명분을 부여했다. 스스로를 납득시킨 후에야 그는 비로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피와 술로 질펀한 연회장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얼굴은 다시 얼음장 같은 선봉장의 그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편 창고에 홀로 남겨진 은랑은 어둠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횃불을 가지고 나간 탓에 한 줄기 빛도 없는 완벽한 암흑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후백제 병사들의 승전가와 이따금씩 들리는 여인들의 비명이 이 어둠을 더욱 끔찍하게 만들었다.


뺨이 화끈거렸다. 상귀에게 맞은 고통보다 터진 입술에서 배어 나오는 짠 피 맛보다 그녀를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방금 전의 기억이었다.


‘그의 등….’


자신을 가로막아 섰던 그 넓은 등. 상귀의 목에 칼을 겨누던 그 살기. 그것은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왜… 나를….’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차가운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속임수다. 분명… 속임수일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그래. 나는 신라의 마지막 궁녀다. 왕의 죽음을 목격했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저 자는 나를 회유하려는 것이다. 나를 살려두고 어쩌면 잘 대해주며… 더 큰 정보를 캐내려 하겠지. 신라의 남은 병력이나 보물의 위치 같은 것들.’


그것이 가장 이성적인 추론이었다. 원수가 자신을 지킬 이유는 그것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그가 쪼그려 앉아 자신과 눈을 맞추던 순간이 떠올랐다. “너는… 나를 아는가.” 그의 눈빛은 정보를 캐내려는 심문관의 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만큼이나 길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 혼란은… 진짜였어.’


그녀는 이 위험한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원수다. 그는 내 왕을 죽게 한 원수다. 그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어.’


그녀는 어둠 속에서 뒤로 묶인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그 고통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설영의 눈빛을 잠시나마 잊게 해 주었다.


설영이 연회장에 들어섰을 때 시끄럽던 음악 소리가 잠시 잦아들었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그 시선들을 무시한 채 옥좌를 차지하고 앉은 견훤에게로 곧장 걸어갔다. 견훤의 옆자리에는 아까 창고에서 도망쳤던 상귀가 분노와 치욕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설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견훤은 손에 든 술잔을 천천히 돌리며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술에 취한 듯했지만 그 속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설영. 나의 가장 날카로운 칼. 나의 선봉장.”


“…….”


“상귀가 그대가 포로 계집 하나를 두고 아군에게 칼을 뽑았다고 하더군.”


견훤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그 안에 담긴 위압감이 연회장 전체를 짓눌렀다.


“사실인가.”


상귀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폐하! 저것은 명백한 하극상입니다! 제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전리품을…!”


“조용히 하라.”


견훤의 한마디에 상귀는 입을 다물었다. 견훤은 오직 설영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영은 고개를 숙인 채 미리 준비해둔 대답을 꺼냈다.


“심문할 것이 남았습니다.”


“심문?”


“그 계집 저항이 유독 거셌습니다. 그리고… 저를 아는 듯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만으로 아군의 목에 칼을 겨누었다고?”


“그녀에게서 이상한 물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설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견훤에게 옥 조각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만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였다.


“그것에 대해 캐물을 것이 있었습니다. 상귀 장군이 심문을 방해하기에 제지했을 뿐입니다. 아군을 해할 의도는 없었으나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혼란을 감추고 오직 ‘임무’와 ‘쓸모’라는 가장 합리적인 이유를 내세웠다.


견훤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술잔을 돌리는 그의 손가락 소리만이 정적을 가르고 있었다. 상귀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이윽고 견훤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그래야 나의 설영이지!”


견훤은 자리에서 일어나 설영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쥐었다.


“과연 빈틈이 없군. 나는 그저 그대의 칼이 무뎌졌을까 염려했을 뿐이다.”


“폐하….”


“상귀. 네놈은 술에 취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했구나. 설영 장군이 임무를 수행 중인데 어찌 감히 방해를 한단 말이냐.”


“하 하오나 폐하! 저것은…!”


“물러가라. 더 이상 듣지 않겠다.”


상귀는 분함에 몸을 떨었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는 설영과 견훤을 번갈아 노려보다가 결국 절을 하고 물러났다. 그의 뒷모습에는 설영을 향한 깊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


연회장은 다시 시끄러운 음악 소리로 채워졌다. 견훤은 설영의 곁에 선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계집에게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겠느냐.”


“확실치 않습니다. 허나… 신라의 잔당과 연결될 실마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다.”


견훤은 설영의 어깨를 다시 한번 두드렸다. 그의 눈은 아까의 웃음기와 달리 여전히 차가웠다.


“허나 장군. 명심하게.”


“…….”


“전리품에 마음을 뺏기는 순간 그 칼날이 무뎌지는 법이야.”


견훤의 시선이 설영이 옥 조각을 넣어둔 가슴팍을 향했다. 설영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견훤은 그 옥 조각의 존재를 모를 터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 계집이 쓸모가 다하면 그대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게.”


견훤은 설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대의 충심을 내가 다시 의심하게 만들지 말게. 알겠는가.”


“…명심 하겠습니다.”


설영은 차가운 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견훤의 시험을 통과했지만 동시에 더 무거운 족쇄를 차게 되었다. 그는 시간 안에 ‘비밀’을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알아낸 뒤에는 그 ‘열쇠’를 은랑을 제 손으로 파괴해야만 했다.


그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차가운 술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가슴속을 태우는 옥 조각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는 술잔 너머로 어둠이 갇힌 창고 쪽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묶어둔 그 ‘이상한’ 여인을 떠올렸다.


술자리는 새벽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설영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 취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견훤의 마지막 명령과 그보다 더 풀기 어려운 은랑의 눈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병사들을 뒤로하고 다시 창고로 향했다. 이번에는 누구의 눈도 피하지 않았다. 그것은 왕의 명을 수행하는 장수의 당당한 걸음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보이려 애썼다.


‘쓸모가 다하면… 죽여라.’


그 말이 그의 걸음걸이를 재촉했다. 그녀의 ‘쓸모’를 증명할 시간은 해가 뜨기 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심문해야 한다. 그뿐이다.’


그는 자물쇠를 풀고 다시 창고 문을 열었다. 밤새 켜두었던 횃불은 거의 다 타들어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가물거리고 있었다. 어둠과 빛의 경계가 흐릿한 그곳에 은랑은 여전히 묶인 채 벽에 기대어 있었다. 그녀는 잠들지 않았다. 아니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영은 문을 닫고 횃불을 벽에서 뽑아 들었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몸을 움츠리는 것이 느껴졌다.


“날이 곧 밝아온다.”


설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밤바람에 식어 더욱 차갑게 울렸다.


“생각은 해 보았는가.”


은랑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터진 입술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무엇을….”


“네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인지.”


설영은 쪼그려 앉아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횃불이 두 사람의 얼굴을 위태롭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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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기획 및 집필 작가] 글을 씁니다. 계속 써 왔고 앞으로도 씁니다. 쓴 글들을 통해 또 쓰려는 이야기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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