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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는, 랑

(환생 로맨스 유니버스) - 2

by 라한
다시 우는, 랑



북소리가 멎었다. 하늘의 경고라 불리던 거대한 울림은, 피에 젖은 가죽이 찢겨나가는 소리와 함께 비명조차 삼켜버렸다. 한 나라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바람이 스몄다. 차가운 칼날이 제 살을 파고드는 감각보다, 그 칼을 쥔 자의 손아귀가 더 시렸다.


“아… 버님….”


공주는 자신을 꿰뚫은 검을 쥔 아비를 올려다보았다. 왕의 눈에는 딸을 향한 연민 대신, 무너진 조국에 대한 절망과 배신당한 왕의 분노만이 가득했다.


고통보다 먼저 사무친 것은 배신감이었다. 머릿속에 그 이름 하나가 핏물과 함께 심장에서 역류했다. 그가 조국을 택했음을, 그리고 자신을 기만했음을 깨달았다.


‘결국… 나를 이용한 것이었습니까.’


귓가에 쟁쟁한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달콤했던 그 약조가 이제는 독이 되어 심장을 태웠다.


‘이 옥피리를 불면, 하늘 끝에 있어도 그대에게 달려가겠소.’


그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품속의 옥피리를 꺼냈다. 진실을 묻기 위해서. 아니, 어쩌면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더 그 얼굴을 보기 위해서. 흐려지는 숨을 몰아쉬며 피리를 입술에 가져갔다.


하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후, 하고 내뱉은 숨은 붉은 피거품이 되어 피리의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때였다. 무너진 성문 사이로,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그가, 이국의 왕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갑옷은 찢기고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분명 그였다.


“안 돼! 안 된다! 눈을 떠!”


자신을 보며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거짓말. 이제 와서 저런 표정을 짓다니.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거짓말쟁이.


늦었다.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그녀는 그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그녀의 눈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지독하게 원망하고 있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옥피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쨍, 하는 맑은 파열음과 함께 두 조각으로 깨졌다. 그녀의 절망을 본 왕자 역시, 기꺼이 아비가 내린 독이 든 잔을 들었다. 사랑은 그리움이 되지 못하고, 천 년을 썩어 문드러질 지독한 원망이 되었다.


927년, 불타버린 서라벌의 왕궁. 승리의 연회가 한창이었다. 견훤은 신라의 옥좌에 앉아, 신하들의 아첨 섞인 술잔을 받았다. 포석정에서 죽은 경애왕의 피가 마르기도 전이었다. 술 냄새와 피비린내가 역겹게 뒤섞여 전각을 감쌌다.


연회 구석,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 사이에, 은랑이 숨죽인 채 앉아 있었다. 그녀는 거문고를 앞에 두고,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경애왕이 가장 아꼈던 궁녀이자,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왕의 숨겨진 딸이었다.


그녀는 아비의 복수를 위해, 일부러 포로로 잡혔다. 살아남은 악공들 틈에 섞여, 원수의 심장부, 바로 이곳까지 잠입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녀의 손길은 거문고 줄을 뜯고 있었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은 옥좌의 견훤을 향해 있었다.


‘아버지….’


그녀는 거친 삼베옷 소매 안에 숨긴, 날카로운 비녀를 움켜쥐었다. 옥좌까지의 거리, 견훤의 곁에 선 호위병들의 수, 그리고 그들의 빈틈. 그녀는 이 지옥 같은 연회가 시작된 순간부터, 오직 그것만을 세고 있었다.


‘오늘, 저 역적의 심장을 꿰뚫고, 아버님의 원한을 갚겠습니다.’


그녀의 불타는 시선이 옥좌의 견훤을 향한 그때였다. 마치 그녀의 살기를 읽기라도 한 듯, 한 사내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후백제의 선봉장, 설호였다. 그는 이 연회장의 모든 경비를 총괄하고 있었다.


설호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평생을 지독한 두통에 시달려왔다. 특히, 오늘처럼 전승을 축하하는 북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면,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는 이 고통을 잠재우기 위해, 연회장 구석의 찬 공기를 쐬러 나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고통이… 가라앉는다.’


저 악공들 틈의 그녀. 고개를 숙인 채 거문고를 타는 저 이름 모를 그녀. 그녀에게 다가서는 순간, 그를 평생 괴롭히던 지독한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이유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죄책감이 심장을 짓눌렀다.


‘이상하다.’


그는 이 기묘한 감각에, 그녀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악공이라기엔, 너무나도 위태롭고, 또 너무나도… 위험해 보였다.


마침내, 견훤이 술에 취해 크게 웃으며 옥좌에 몸을 기대는 순간이 왔다. 경비가 가장 허술해진 그 찰나. 은랑이 움직였다. 그녀는 거문고를 밀치고 일어나, 그림자처럼 옥좌를 향해 스며들었다. 그녀가 소매에서 비녀를 꺼내 견훤의 목을 향해 내리찍으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년, 감히!”


설호가 바람처럼 날아와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쨍그랑-’


비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자객이다!”


병사들이 칼을 뽑아 들고 두 사람을 에워쌌다. 설호는 그녀의 팔목을 꺾어 제압했다. 두 사람의 얼굴이, 숨결이 닿을 듯 가까워졌다.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설호는 보았다. 자신을 향한 지독한 증오. 그리고, 그보다 더 깊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그를 짓누르던 죄책감이, 감당할 수 없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당연히 내려쳐야할 칼이 무더져 설호는 응당히 죽음을 선물해야만 하는 이 여인을 바로 죽일 수가 없었다.


“저… 저 계집이!”


견훤이 술이 깨 놀라 소리쳤다. 병사들이 창을 겨누었다.


‘지금, 죽여야 한다.’


설호의 이성이 명령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그녀를 살리라 외치고 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저쪽이다! 첩자가 더 있다! 악공들 틈에 숨었다!”


설호은, 일부러 연회장 반대편을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의 시선이 잠시 돌아간 그 틈을 타, 그는 은랑의 팔목을 낚아채 어둠 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곳은 궁궐의 비밀 통로였다.


“사라져라.”


그가,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팔목을 잡은 손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다시는… 내 눈에 띄지 마라.”


그는 그녀의 등을 떠밀어, 어둠 속으로 그녀를 도망치게 했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자객을 쫓아라!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은랑은 정신없이 어둠 속을 달렸다.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왜….’


그 원수가, 왜 자신을 살려주었는가. 그의 혼란스럽던 눈빛. 그녀의 팔목을 잡았던 그 뜨거운 손. 그녀는 자신의 복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가로막혔음을, 그리고,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건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온다.’


차가운 돌바닥 위를, 은랑은 정신없이 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는 소음이 희미해질 때까지, 그녀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낡고 축축한 비밀 통로의 공기가 폐부를 찔렀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녀를 살려준 그 남자의 마지막 속삭임, ‘사라져라’,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막다른 벽에 다다르자, 은랑은 벽의 희미한 틈새를 더듬었다. 아버지가 알려준 대로 돌 하나를 밀자, 끼익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돌아가며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폐허가 된 서라벌 외곽의, 인적 드문 대나무 숲이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달아오른 뺨을 식혔다.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기쁨보다, 복수에 실패했다는 치욕과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그녀를 더욱 거세게 짓눌렀다. 그녀는 설호에게 붙잡혔던 자신의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뜨거운 손아귀가 마치 낙인처럼, 여전히 그녀의 살을 태우는 듯했다.


‘왜… 나를 살려주었지?’


원수다. 아버지를 죽게 한 원수의 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죽일 수 있었던 그 순간에, 오히려 자신을 도망치게 했다. 그의 혼란스럽던 눈빛. 그녀의 팔목을 잡았던 그 손에서 전해져 온, 알 수 없는 열기가 이상하게 뜨거워 식지 않았다.


“헛소리!”


은랑은 자신의 뺨을 세게 내리쳤다.


‘정신 차려라, 은랑. 그는 원수다. 속임수일 뿐이야.’


그녀는 품속에서, 어머니의 유품이자, 그녀가 아비의 복수를 맹세했던 ‘깨진 옥 조각’을 꺼냈다. 그녀의 것은, 온전한 하나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내려왔다던 가문의 보물이었지만 부서진 채인 옥피리의 반쪽이었다. 차가운 옥 조각을 쥐자, 비로소 격렬하게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었다.


‘아버지. 반드시 저놈들의 심장을 꿰뚫겠습니다.’


그녀는 옥 조각을 쥐고, 다시 한번 복수를 다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견훤을 직접 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곁에는, 설호, 그가 있었다.


‘그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은랑는 생각했다. 그가 왜 자신을 살려주었는지. 그의 약점이 무엇인지. 그녀는 설호를 다음 목표로 삼았다.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그를 죽이러 갈 것이었다. 이번에는, 그의 막사를 노릴 생각이었다.


은랑은 대나무 숲의 이슬을 손으로 훔쳐 목을 축였다. 그리고는 밤새 몸을 숨겼던 외딴 사찰, 아버지 경애왕이 그녀를 위해 몰래 마련해 둔 은신처로 향했다. 복수를 위한 다음 단계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은랑이 사라진 어둠의 통로를 뒤로하고, 설호는 칼을 칼집에 꽂았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악공들을 포박하고, 견훤은 옥좌에서 내려와 분노로 떨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이냐! 자객이! 감히 내 목을 노려?”


그때, 견훤의 곁을 지키던 장수 상귀가 피처럼 붉어진 얼굴로 설호에게 다가왔다.


“설호! 네놈은 무얼 한 게냐! 자객을 코앞에서 놓쳐?”


상귀의 목소리는 고의적인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설호가 자객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보인 미묘한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설호는 상귀를 차갑게 지나쳐, 견훤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자객을 제압했으나, 놈이 교활하여 연회장 뒤편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첩자가 더 있다는 외침에 병사들이 혼란해진 틈을 탔습니다.”


“놓쳤다?”


견훤의 눈이 가늘어졌다.


“네놈의 칼을 피할 정도의 실력자였단 말이냐.”


“아닙니다. 실력은 형편없었으나, 독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압하는 과정에서….”


설호는 일부러 자신의 팔목을 움켜쥐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았던 그 자리였다.


“놈이 품고 있던 독침에 스친 듯합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을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 자신의 ‘부상’과 ‘실수’를 인정하는 것뿐임을 알았다. 상귀가 그 말을 비웃었다.


“독침이라? 나는 네놈이 일부러 놓아준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떠냐!”


“상귀!”


설호가 낮게 으르렁거리며 일어섰다.


“네놈은 폐하의 옥좌를 지키는 놈이, 자객이 칼을 뽑을 때까지 무얼 했는가! 감히 그 입으로 나를 모함해?”


“뭐라고!”


“그만두지 못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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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기획 및 집필 작가] 글을 씁니다. 계속 써 왔고 앞으로도 씁니다. 쓴 글들을 통해 또 쓰려는 이야기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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