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지만, 자기주도학습으로

고등 편

by My Way

과학고 합격 후 만끽했던 기쁨은 약 1주일 남짓이었습니다.

예비소집에 참석하고 나서야 비로소 현실감각이 돌아왔죠.

마침 그날 학교 밖에서는 '과학고 맞춤 수업'을 한다는 몇몇 학원에서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사교육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던 저희는 분위기도 익힐 겸, 그곳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하나 궁금한 마음에 제일 먼저 눈에 띈 전단지를 들고 무작정 찾아가 보았습니다.


20명가량 앉을 수 있는 좁은 교실에는 예비소집에서 보았던 아이들과 그 학부모들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머지 아이들 대부분도 각자 다른 학원으로 흩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원 원장 선생님의 학원 홍보 겸 설명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과학고는 선행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말은 예비소집에서도 들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습니다.

둘째, 과학고 1학년 1학기 중간고사 시험 성적이 3년을 좌우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중간고사 등수를 뒤집는 학생을 본 적이 없다"는 단언까지 덧붙이셨죠. 학원 수업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저희에게 이 말은 생소하면서도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정말일까?' 하는 의심과 함께,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감이 한꺼번에 밀려왔습니다.

셋째, 과학고 학생들만을 위한 소수정예반을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 말의 진짜 의미는 아마도 "지금 등록하고 가시라"라는 것이었겠죠? 그런데 그 말은, 앞선 그 어떤 설명보다 강력했습니다. 결국 저희는 그 자리에서 등록을 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학원 설명회를 듣는 내내, 제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과학고 공부는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다"는 학원 원장 선생님의 말씀이 머리에 콕 박혀 좀처럼 떠나질 않았습니다. 특히 선행이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아이가, 학원의 도움 없이 과학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고수해 왔던 '사교육 없는 자기주도학습'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할 때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사교육 없이 공부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해 오던 아이 아빠 역시 학원 설명을 듣고 난 뒤, 아이에게 3가지 이유를 들어 학원을 한번 다녀볼 것을 권유했습니다.

첫째, 학원이 어떤 방식으로 수업을 하고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겪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점.

둘째, 과학고 반이 따로 개설되어 있으니 학원에서 학교 친구들을 미리 만나 교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점.

셋째, 학원 수업을 통해 친구들의 학습 수준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점이었습니다.


아이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빠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저희는 물리와 수학 두 과목을 등록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물리와 수학 수업을 한두 차례 듣고 난, 약 1주일 후, 아이는 학원을 그만두고 다시 자기주도학습으로 공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이 아빠가 학원을 다녀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3가지 이유 중 실제로는 두 가지가 전혀 충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첫 번째 이유였던 학원 수업 방식에 대한 경험은 분명 얻을 수 있었습니다. 수업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기본적인 선행이 되어 있다는 전제 아래 복습 위주로 이루어졌으며, 숙제의 양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이유였던 친구들과의 교류는 기대와 달랐습니다. 아이들이 한 학원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과목별로 이 학원, 저 학원을 옮겨 다닌 탓에 학원을 옮기지 않던 아이가 친구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 이유였던 친구들의 수준을 가늠해 보는 것 역시 어려웠습니다. 질문이 사실상 차단된 일방적인 수업 방식,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분위기, 수업에 수동적으로 임하는 아이들의 태도 속에서 친구들이 어떤 생각으로 공부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스스로 공부하는 것이 익숙했던 아이는, 과학고 입학 전에 혼자 해보겠다고 계획해 두었던 공부만 해도 이미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에 지나치게 많은 학원 숙제까지 더해지면서, 아이는 스스로 하고 싶은 공부와 강제적으로 해야 하는 공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데 큰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학원을 다녔던 그 일주일 동안,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공부방으로 들어가 학원에 가기 전까지 학교에서 내 준 숙제와 학원 숙제를 번갈아가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학원 숙제를 다 끝내지 못한 채 학원을 향해야 했습니다. 막상 수업에 들어가면 진도가 너무 빨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넘어가는 내용들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서너 시간 수업을 듣고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학원에서 배웠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들을 다시 들여다보다가 잠들곤 했습니다.


아이 생각에는 학교에서 내준 숙제가 더 중요해 보여, 그쪽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숙제들 역시 수준이 상당해, 중학교 수준에 머물러 있던 아이에게는 어려운 문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문제 하나를 푸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조급했고, 그 와중에 학원에서 배운 내용마저 이해되지 않으니 공부가 점점 쌓여만 가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짜증이 늘었고, 가슴이 답답하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날까지 생겼습니다.


학원에 가면 학교 공부를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미리 접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던 저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스트레스만 빠르게 쌓여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날 고민한 끝에, 느리더라도 집에서 자기주도학습으로 공부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과학고 입학 후, 다시 학원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저도 엄마인지라,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지극히 주관적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 1, 2, 3'에 이어 고슴도치 시선으로 본 제 아이의 특징을 정리해 볼까 합니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시고, 재미 삼아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쉰 번째 고슴도치 시선] 일주일 남짓이긴 했지만, 학원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저희 일상도 점점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수업을 중심으로 하는 학원이라 그런지 시작 시간이 꽤 늦었고, 수업이 끝나는 시간도 한밤중에 가까웠습니다. 집에서 먼 학원이어서 아이를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차, 이런 일정을 몇 년씩 감당하는 다른 학부모님들이 새삼 존경스러웠습니다.

학원 수업 첫날, 하원 시간에 맞춰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우르르 나간 뒤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저희 아이가 학원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늦은 이유를 듣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동시에 불안과 걱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아이 말에 따르면, 신규 등록한 아이가 첫 수업부터 따라가기 어려워한다는 보고가 올라간 탓에 원장 선생님께서 호출을 하셨다고 합니다. 수업은 어땠냐는 질문에, 선행이 되어 있지 않아 많이 어려웠다고 답하자, 원장 선생님은 마치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아이를 다그쳤다고 했습니다.

"선행이 안되어 있다고? 진짜 하나도 안 했어? 근데 어떻게 과학고에 합격했지? 이런 xx들 결과는 딱 두 가진데. 하나는 진짜 똑똑해서 조기졸업하거나, 하나는 진짜 멍청해서 하위권에서 빌빌거리거나."

아이가 전달한 말의 핵심은 '선행'이었지만, 저는 그 순간 '이런 xx'라는 표현에 꽂혀 화가 났습니다. 동시에 학원 원장님의 날카로운 지적 앞에서는 불안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아이는 상스러운 욕설에도, 원장님의 으름장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학원을 그만두는 결정을 내렸지만, 이후 자기주도학습을 통해 원장님의 예언 중 긍정적인 결과를 스스로 증명해 나가는 모습에서, 저는 아이가 가진 묵묵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이야기] 예비 과학고생의 겨울방학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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