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 편
'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은 공교육만으로 과학고와 카이스트에 입학했던 제 아이의 육아와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자, 사교육 정글을 무사히 통과한 승자의 기록입니다.
'우리 아이도 카이스트에 갈 수 있을까'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이공계 성향의 아이를 키우고 계시는 학부모님들만을 위한 글은 아닙니다. 제 기록의 핵심은 자기주도학습입니다. 사교육을 받더라도, 사교육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주도학습을 하는 아이로 키워보자는 것이 제 기록의 궁극적 지향점입니다.
기타 자세한 메인 프롤로그는 '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 1 _ 영유아편'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이의 과학고 합격은 일가친척들에게 큰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특히 양가 조부모님들께서 크게 기뻐해 주셨고, 주변 지인들로부터도 많은 축하를 받았습니다.
그중에는 과학고 입학 과정을 궁금해하는 분들도 계셨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이런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학고 다음은, 카이스트야?"
사실 저희는 과학고 이후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이가 과학고에 가겠다고 선언한 뒤, 그 준비 과정 전반을 오롯이 스스로 해내는 데 집중하다 보니, '과학고 합격'이라는 목표만으로도 벅찼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의 진로를 차분히 고민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받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과학고 다음은... 카이스트인가?'
물론 그 질문에 대한 현실적인 답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과학고에서 카이스트로 진학하는 학생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지만, 희망한다고 해서 누구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반고보다 수시 실적이 좋고, 더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말도 흔히 전해지지만, 그중에는 사실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섞여 있었습니다.
과학고 합격의 기쁨은, 합격자 예비소집이 있기 전까지만 유효했습니다.
합격 발표 후 약 1주일 뒤, 80명 남짓한 예비 과학고생들과 그 학부모들은 과학고 시청각실에 모였습니다. 학교 소개 안내 책자를 받아 들고, 1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설명해 주시는 학교 교육과정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아이가 과연 이런 곳에서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약하면 대략 이러했습니다.
첫째, 입학은 중학교 과정만으로 가능했을 수 있지만, 과학고 수업은 선행 없이 버티기 어렵다.
둘째, 교육과정 편성표에서 보듯, 일반고에 비해 수업 진도는 훨씬 빠르고, 배우는 과목은 수학, 과학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수준 또한 현저히 다르다.
셋째, 학교에서는 특정 문제집을 권장하지는 않지만, 선배들은 이른바 '바른 돌', '검은 라벨', '힘쎈', '더 높이 올라가는' 문제집들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을 참고하라.
넷째, 방학동안 해야 할 과제들이 있으며, 입학하기 전까지 해오면 된다.
특히 세 번째, 과학고에서 유명하다는 문제집 이야기가 나오자 학부모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바른 돌', '검은 라벨', '힘쎈', '더 높이 올라가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알지 못해, 같이 웃을 수 없는 묘한 거리감을 느꼈습니다.
* 바른 돌 = 정석, 검은 라벨 = 블랙라벨, 힘쎈 = 쎈 수학, 더 높이 올라가는 = 하이탑
아이 역시 아직 과학고의 현실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탓에, 영재교육을 함께 받았던 낯익은 친구들이 많아서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친구 관계보다, 선행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의 '학습'이 더 염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예비소집이 끝나자마자, 저희 가족은 다른 학부모 무리에 휩쓸려 과학고 전담반이 개설되어 있다는 학원 설명회로 향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학원 원장님의 현란한 말솜씨와 공포(?) 마케팅,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해, 결국 학원 등록까지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아이의 과학고 생활은, 아이러니하게도 '사교육의 유혹'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중학교 과정 동안 자기주도학습을 비교적 탄탄하게 실천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과학고 입학을 앞두고 마주한 현실 앞에서는 그 유혹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이는 과학고에 재학하는 동안에도 결국 사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과정은 중학교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힘겨웠습니다.
과학고는 월요일에 등교해 금요일에 하교하는 기숙학교 시스템이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금요일 하교 후부터 일요일까지 사교육 정글 속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아이는 학교 선생님들께 "학원을 다니지 않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씀 드렸고, 선생님들께서는 자기주도학습만으로 과학고 생활을 이어가려는 아이를 응원해 주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학원에서 가르치는 문제 풀이 스킬이 부족한 아이의 풀이를 꼼꼼히 살펴봐주셨고, 질문에도 성심껏 답해주셨습니다. 또 진로와 진학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눠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과학생활을 무사히 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아이는 그동안 해왔던 공부법만으로는 학교 생활을 버텨내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부 방법을 수정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습니다. 빠른 진도와 넘쳐나는 과제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소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조금씩 자신만의 방법을 만들어갔습니다. 정해진 취침 시간을 넘겨가며 공부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수면 시간을 확보해야 했고, 월등한 실력을 지닌 아이들 틈에서는 흔들리지 않기 위해 멘탈을 부여잡는 일도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학고에서의 생활은 아이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극한의 경쟁사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과학고 학생들의 학교생활에 대한 만족도는 전반적으로 높았습니다. 그렇게 공부가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왜 많은 아이들이 전학 대신 학교에 남기를 선택할까요?
앞으로 펼쳐질 글은 과학고 생활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자기주도학습에 대한 기록입니다. 제 아이가 사교육 없이 어떤 방식으로 공부해 왔는지, 대학 입시를 위해 어떤 선택과 노력을 해왔는지, 그리고 진로는 어떻게 정했는지를 담았습니다.
그렇기에 이 기록은 과학고뿐 아니라, 다른 특목고나 자사고, 일반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과 그 학부모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약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사교육 정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의 마지막 이야기, <사교육 정글 속 생존자의 기록 4 _ 고등 편>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다음 이야기] 느리지만, 자기주도학습으로
이 이야기의 첫 단추 영유아편과 본격적인 교육 이야기를 담은 초등 편, 그리고 자기주도학습을 실천했던 중등 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