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시켰다가, 제가 다녀왔습니다!

by My Way

지난여름, 큐브 수박 슬러시에 푹 빠진 가족들을 위해 주말마다 수박을 배달시켰습니다.

손가락 클릭 하나로 무거운 수박을 집에서 배달받는 것이 어찌나 편하고 좋은지, 배달 기사님의 노고는 생각지도 못했더랬죠. 그런데 배달시킨 수십 통의 수박 중 딱 한 통이, 하필이면 배달 중에 제 눈앞에서 쩍 갈라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평소에는 배달 기사님과 마주칠 일 없이 문 앞 배송을 택하는데, 그날은 뭐가 급했는지 배달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반갑게 인사하며 배달 기사님이 카트에서 내려주는 물건들을 바로바로 집으로 들였는데,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수박이 약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쩍'하고 갈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배달 기사님은 눈앞에서 반으로 갈라진 수박을 보며 당황하신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죠. 왜냐하면 배달되자마자 수박을 큐브형태로 자를 생각이었거든요.

큰 수박 덩어리를 반으로 가르는 게 제일 힘든 일이라 잘 되었다 싶었는데, 배달 기사님은 자신의 실수라 여겼는지 몇 번이고 사과를 하시더라고요. 아무리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배달 별점까지 걱정하시며 배상을 해주겠다고도 하셨습니다.


결국 저는 평소엔 별점을 매기지 않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별점 5점을 체크해 안심을 시켜드리고, 진심으로 괜찮다는 제 의사를 확실히 전달했죠.

그 일을 계기로 저는 배달 기사님들이 얼마나 조심하며 배달하는지 알게 되었고, 무거운 수박을 배달해 주신 것에(이미 10통은 넘게 먹고 나서야), 뒤늦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오랜만에(?) 배달 사고가 또 생겼습니다.

'배달 완료' 문자를 보고 문을 열었는데, 집 앞이 텅 비어 있는 겁니다. 가끔 배달보다 '배달 완료' 문자가 먼저 오기도 해서, 집안일을 하며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난 뒤 다시 확인해 봐도 배달 물건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홈페이지에서 배달 기사님의 전화번호를 확인해 전화를 드렸습니다.


"배달 완료 문자를 받았는데, 집 앞에 물건이 없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는 배달을 제대로 했는데예."

"하지만 집 앞에는 물건이 없는걸요?"

"101동 OOOO 아닙니꺼?"

"여긴 102동 OOOO인데요?"


배달 기사님의 실수가 맞았습니다.

다른 동, 같은 호수에 배달을 완료하고 문자를 보내신 거였습니다. 하지만 배달 기사님의 다음 말은 정말 오랫동안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제 분노 버튼을 누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짤까예? 내 실수라 뭐라 말은 못 하겠는데, 그거 좀 옮기면 안 되겠습니꺼?"


순간 저 단전 끝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저는 밖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 일자 눈을 한 채 듣고만 있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막막했죠.


"......"

"여보세요? 제가 거기 가려면 저녁은 되어야 하는데, 우짤까예?"

"...... 101동에 갖다 두신 건 확실한가요?"

"예, 그런 것 같네예."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


뚝.

저는 소심하게 전화를 끊는 것으로 분노 표출을 대신하였습니다.


이후, 저는 102동에서 101동으로 넘어갈 방법을 궁리했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주상복합아파트라 다른 동으로 넘어가려면 관리실 통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게다가 연결된 오피스텔도 있고, 엘리베이터도 2개 호실씩 묶여서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길치인 저로서는 고난도 미로 같은 곳을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만약 물건이 그곳에 있다면 그걸 가지고 올 방법도 강구해야 합니다.


배달 기사님은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하시지만, 제게는 몇 가지 미션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분노가 슬슬 짜증으로 변할 때쯤, 저는 겨우 물건을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공동으로 쓰는 카트를 빌리고, 관리실 통로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는 구별이 안되어서 찍기 신공으로 타고 올라가 제 물건들을 카트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카트에서 내린 물건들을 집으로 옮겨놓고 다시 카트를 갖다 두었는데, 총 40분이 걸렸습니다.


집에 와서 땀으로 범벅된 채 물을 한 컵 벌컥벌컥 마시는데, 배달 기사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오더군요.

물건이 제대로 있는지 확인해 연락 달라 하시고, 물건을 제가 옮길 건지, 자기가 갈 때까지 기다릴 건지 알려달라 하셔서, 물건은 제대로 확인했고, 제가 가지고 왔다고 연락드렸습니다.

그리고 한마디 했습니다.


"102동에서 101동으로 넘어가는 게, 입주민한테는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아, 예예, 미안합니더. 다음에는 신경 써서 배달할게예."


사실, 이런 일에 이렇게 반응해 본 건 제 생애 처음인 것 같습니다.

화가 나더라도 입바른 소리, 남 타박하는 소리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날은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하필이면 무거운 생수에, 물티슈 묶음을 주문한 날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일단락되고 나니, 대화 도중 전화를 그냥 끊은 것과, 기사님께 한마디 했던 것이 후회가 되더라고요.


배달을 시킨 사람의 권리였다는 자기 합리화와 그럼에도 배달 기사님의 실수에 그런 식으로 반응한 건 너무 과했다는 자괴감 속에서 그날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저는 등에 담이 결렸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면서 안 쓰던 근육을 쓴 대가를 며칠째 치르는 중이죠.


저, 벌 받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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