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타인의 고통은 액자 속의 폭풍이다”
이 말만은 꼭 남기고 싶다
막이 열리고
마침내 들어온 곳이 상자다
먼 미래를 돌아 돌아온 곳이 홀연히 흑백 상자다
바코드처럼 일렬로 선 모형구름 그림자들
과거를 할당받은 모형영혼 그림자들
상자 속엔 그림자들 말고도 엉킨 실타래가 있다
실 끝에서 자라나는 독기
만약 상자 속에도 태양이 있다면 그토록 창백한 열기로부터 나는 웅크려 엉킨 실타래 속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 실을 타고 오르는 독기로부터
부표처럼 떠다닐 운명이 아니라고 나지막이 속삭이면서 표정도 없이 우는 심장만큼 투명할 수 있을까 상자는 흉내 내기 쉬운 상처처럼 열려 있는데 그 바깥은 뻔히 보이지만 쏟아져 흘러 들어오는 어둠이 너무도 빛나는 바늘 끝 같아서 한번 돌아서면 불러 세울 수 없는 사람의 뒷모습처럼 아득한―
상자 속의 곡두
휘날리는 첨탑의 막후
곡두는 막후를 불러 세우고
배앓이 하는 막후는 지쳐 끌려 간다
상자 속엔 격자무늬로 새겨지는 모형 기류와 네모반듯한 구멍들
리코더를 부는 사내가 연주를 하고
곡두는 막후를 일으켜 세워
니 죄를 고하라
소리 지를 때
막후는 큰 소리로 답한다
"나는 누구도 아닌 자요
그러니 죽어 마땅히 살아야 하는 자니
그대 나를 풀어 흰 바탕에 까만 작은 점으로 살게 해주시오
모든 빛이 은밀해졌을 때 나는 홀로 아득해질 터이니
걱정 마시고 풀어주시오 지난 꿈처럼 사라질 터이니"
......
막이 내리고 다시 막이 올라간다 막후가 다시 나와 이야기 한다
"친애하는 곡두에게 할 말이 더 남았소
나는 위태로운 구름이요
위험한 우비요
험준한 구두요
하오니 나를 구름처럼 잊으시오"
막이 내리고 막은 다시 오르지 못한다
곡두의 비명 소리는 상자 바깥에는 들리지 않았다
적란운처럼 생긴 고독들이 상자 속에 가득하다 모형그림자들 춤을 춘다 인간인지 짐승의 것인지 알 수 없이 흐물거리는 영혼의 그림자들 흉내 내기 쉬운 상처처럼 생겨먹은 흑백 상자는 백지 앞에 펜을 놓고 잠드는 시인을 바라보고 있다 시인의 방, 창틀에 메모가 놓여 있다.
"나의 크리처 막후의 곡두여
액자 속 전신 거울이여
곡진하게 바랍니다
제발 출렁이는 백지를 멈춰주세요"
<시작노트>
이 詩를 창작하면서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표현하려고 애썼다.
먼저 현재적 공간으로서, 존재적 공간으로서, 메타적 공간으로서 '상자'라는 폐쇄 공간 즉, 존재의 감옥이자 무대로서의 공간, 상자'를 상정했다
작업하면서 '상자'가 여러 층위에서 해석되기를 기대했다. 결국 닫힌 상자라는 설정은, 탄생 자체가 곧 죽음 혹은 한계로의 진입임을 암시하는 '실존주의적 비극성'을 의도하였다
이 시에서 사용한 '곡두'(환영)와 '막후'(실제 뒤의 배후)는 이 시의 백미.곡두는 환영이며 막후는 실제 뒤이 존재를 의미하며 자아의 분열과 투쟁을 말하고자 단어의 사용을 의도했다.
이 시의 본문에서
곡두가 나를 심판하고 "네 죄를 고하라"고 외치는 부분은 사회적 자아 혹은 초자아(Superego)가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이며 막후가 "나는 누구도 아닌 자"라고 답하는 부분은 사라지길 원하는 본연의 자아를 드러낸 것이고 막후가 "나를 풀어 흰 바탕에 까만 작은 점(글자 혹은 점 하나)으로 살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은, 존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시인이 차라리 언어의 파편으로 증발하고 싶어 하는 처절한 욕망을 표현한 문장이다.
"타인의 고통은 액자 속의 폭풍이다"
도입부의 이 문장은 이 시를 관통하는 철학적 기둥으로 삼았다,
타인의 고통이나 감정(폭풍)은 내게 직접 닿지 않는 '액자 속의 그림'일 뿐이라는,
타인의 시선과 감정과 서늘한 단절을 선언하며 시의 말미에서 시인은 자기 자신조차 '액자 속 전신 거울'이라 부르며,
그 단절의 화살을 시인 자신에게 돌린다는 설정을 하였다.
작품에서 "시인의 방'과 '크리처"라는 단어의 채용은 창작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하여 선택한 단어이며 '이 시의 끝부분에 표현된 "흉내 내기 쉬운 상처처럼 생겨먹은 흑백 상자"는 곧 시인이 써 내려가는 시의 본질을 가리킨다.
자평하자면 이 적품을 단 한 줄로 비평하자면 "언어로 현상한 초현실적 엑스레이"롤 명명하기로 하며 자찬하건대 이 작품은 표현주의의 극치이며 한마디로 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