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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16. 2020

가위 소리

예리한 칼날을 가진 두 입술은 매우 직설적이다.

가위 소리

 


신문을 읽다가 갈무리해 두고 싶은 글을 가위로 오려낸다.

사각사각 오랜만에 들어보는 가위의 목소리 그동안 나는 가위에게 아무것도 먹이지 못했다.

가위질 소리와 함께 아련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


가위가 귀하던 시절이었다. 반짇고리에 실꾸리들과 바늘방석이 함께 담긴 하나밖에 없는 우리 집 가위는 여기저기 불려 다녔다. 커다란 입을 가진 무쇠가위로 우리들의 옷을 지으시던 어머니 곁에서 ‘써억썩’ 가위소리가 났다. 앞머리가 눈을 찌를 듯이 길어지면 머리에 물을 축여 빗질을 하며 잘라주었다. 자꾸만 삐뚤어지는 머리를 고르느라 이마를 누르던 지루한 가위의 촉감은 무거웠다. 아버지는 식구들을 씻기고 나서 손톱발톱을 자를 때도 이 가위 하나로 해결했다





가위를 보면 무엇이든 오리고 싶었다. 학용품으로 작은 가위를 가진 뒤로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종이인형을 만드는 일은 여간 즐겁지 않았다. 커서는 스크랩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다. 그때그때 취향이 달랐지만 나의 호기심은 주로 문화면이다. 마음에 드는 시를 발견하거나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에 대한 기사라든지 작가와의 대담 같은 글이 있으면 반가워서 가위부터 찾았다. 선을 따라가며 싹싹 오려낼 때의 가위 소리는 사뭇 조심스럽고도 곳간을 채우듯 즐거운 작업이었다





예리한 칼날을 가진 두 입술은 매우 직설적이다. 차가울 정도로 명쾌하게 나누어주는 것을 좋아했다. 가위질을 한 뒤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안쪽이다. 관심 밖으로 밀려난 바깥과 엇갈리는 행보는 선택이 아니면 폐기로 단호하게 갈라선다. 쓸모와 쓸모없음으로 나뉜 것들은 오브제처럼 생명을 얻거나 바닥에 떨어져 어지럽게 뒹굴다 사라진다. 그때는 바깥을 생각하지 못했다. 친구도 가려가며 사귀고 내 오감은 늘 바른 길을 고집하며 안쪽과 함께하면서 바깥을 소외시켰다





가윗날 위에 여자가 위태롭다. 두 손과 두 발로 가위의 양날을 밀어붙인다. 예리한 날에 베일까 몸이 오그라든다. <노고>라는 제목의 미술작품을 보는 순간 우리가 사는 세상을 향해 섬뜩하리만큼 직설적으로 말하는 작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위질 하지 말라’고. 세상 밖으로 밀려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 쓸모를 잃고 직장에서 명퇴를 강요당하는 분위기처럼 느껴진다. 가위 앞에서 삭제될 운명에 놓여있는 우리들의 고단한 삶을 반영했다. 그동안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것들을 돌아보며 인생의 쓴맛을 본 자들을 생각했다. 섣불리 가위를 들었다가 잘려나간 다시 품지 못하는 것들. 함부로 가위질해 오려낸 바깥은 주변을 서성이다 수없이 삭제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쓸모만으로 모든 선택의 기준을 삼는다면 너무 심심하고 삭막하리라. 식상할 정도로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을 맞는다면 살맛을 잃어버릴 것 같아 잘려나간 바깥을 돌아본다. 내게 중요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잘려나간 것들은 저마다 같지 않은 취향으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먹고 사는 일처럼 중요한 게 없고 반듯한 길 걷기를 모두가 바라지만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답답하지 않을까. 둘 다 품어서 어우렁더우렁 지내는 데서 사람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오히려 예술의 세계는 시선의 바깥쪽에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가위로 잘라질 때 안과 밖은 닮은꼴의 테두리를 나누어 가진다. 덜어낸 만큼 텅 빈 고요가 깃드는 밖은 언제 뒤바뀔지 누가 아는가. 쓸모없음의 쓸모를 생각하며 가위 소리에 귀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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