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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네 Oct 20. 2024

계절 과자 도감

秋, 庭 : 가을 뜰




알록달록 가을색을 품은 작은 꽃들과

곧게 자라난 풀잎

둥그런 나무둥치

가을로 향하는 길


나무 틈 사이 피어난 들꽃은

가을색이 묻어있고


푸르른 녹빛의 녹음은

서서히 금빛으로 번지고


찬란히 부서지는 햇살 아래

자신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뜰:秋, 庭


생기가 방울지던 푸르고 무더운 여름은 지나고

옅은 녹빛과 노란빛으로 물드는 가을이 온다.


하루사이 달라진 아침의 공기와

높은 하늘 몽글한 구름

초록이 사라진 잎 사이 내리쬐는

초가을의 해는 여름과 달리

뭉근하게 퍼지고 나의 주위를 감싼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기운이

아롱아롱 맺힌 기분에

손안에 가을이 잡힐 듯

괜스레 손을 뻗어 죔죔

쥐어본다.  가을인척 하던 아침의공기는

손틈 사이로 빠져나가고

해가 동글해지면 다시 강렬한 햇살을 뿌린다.

짙었던 여름이 남긴 흔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더위와 함께하다

다시 선선해지기를 반복하는 초가을에

긴가민가 가을인가 여름인가 반복하며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밤공기에는

가을향이 듬뿍 배어있다.




 


여름과 가을 사이 더디게 흘러가기만 하는 날들에

왠지 모르게 추욱 처지는 시간들이 있었다.

그 순간은 찬찬히 나에게 스며들어

눈앞을 가리어 변화하는 시간을 보지 못하게 하고

단지 더위와 질척한 땅, 날벌레와 안개 낀 하늘

매캐한 공기 같은 것들에게 집중하게 했다.


봄처럼 알록달록 꽃비가 흩날리지도

여름처럼 푸르른 녹음이 넘실거리지도

완연한 가을처럼 가을빛으로 일렁이지 않는


무언가 멈춰있는 것만 같은 모호한날들.


앞으로 나아가는 모든 것들을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고 그럼에도 꾸역꾸역 걸어간 곳들은

이미 지나왔던 흔적들이었다.

같은 곳을 빙빙 맴도는 잠자리가 된것만 같아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면 그 자리마다

꾸덕하고 질척한, 알수없는 무언가가

묻어있는것만 같았다.

환기 안된 방처럼 무언가로 꽉막힌 듯한

날들속에서, 이런 모난마음을 안고

두부와 산책을 하러 문밖을 나섰다.




지난여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심어둔

허브와 꽃, 갈대는 어느새 허리만큼 자라

꽃을 피우고 더 짙어진 줄기와 나무둥치는 햇살을

품어 힘 있게 자라나고

이름 모를 들풀과 들꽃, 옹기종기 모여 있는 클로버와

동글한 천일홍 푸릇한 향기를 내뿜던 세이지.

나비와 벌들은 그 사이를 부지런히 날아다녔다.


그 사이 작은 샛길로 두부가 타박타박 걸어간다.

하얀 솜뭉치가 꽃들 사이 어른거린다.

깡총거리며 뛰어가다가도 멈추어 작은 들꽃에

둥그런 코를 박는다. 한참을 가만히 서 냄새를 맡고

다시 힘차게 겅중겅중 뛰어간다.

나무밑동 껍질에 눈을 준다. 풀잎을 입에 물고

낼름거리다 뒤를 돌아본다.

커다란 머루알 같은 눈에 기쁨이 넘실거린다.


모호하고 애매한 날들, 텁텁한 무언가에

갇혀 있는 듯한 날들 사이에도

무언가 조금씩 자란다.

눈에 보이지 않고 선명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희미하게 달라지고 나아간다.

변하고 싶지 않아도 억지로 붙잡고 싶어도

막을 수 없다. 희미한 순간이 하루하루 쌓이면

어느새 선명해지는 날이 온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은 같을 수 없다.

매일이 새로운 하루다.

작고 하얀 솜뭉치, 두부는 당연하게도

그걸 알고 있다.


이번 과자는 이런 초가을의 내가 느낀 감정과

순간을 담아야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어찌 보면 희미한 순간, 희미한 공기,

희미한 시간, 희미한 날들.


희미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운

희미해서 집중해서 보아야 하는 것들

희미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계절의 흐름 속에서 느껴지던 그 희미함

모호한 날들 속에서 보았던 풍경

그 찰나의 순간과 나의 시간을 담아

이번 과자 가을뜰을 작업했다.





초가을에 마주한 산책길의 가을뜰

그 풍경을 담아 형태를 짜고


9월과 10월에 나오는 계절과일을

무화과를 메인으로  

진하게 구운 파트슈크레를 만들고

그위로 다크럼을 듬뿍 넣은

아몬드크림, 은은한 꽃향이 나는 바닐라크림

달콤한 무화과 콤포트, 잘 익은 무화과

향긋한 허브와 꽃으로 구성을 짰다.


짙은 나무둥치를 떠올리며

우리밀로 만든 파트슈크레는

진하게 구워냈다.

이전에 쓰던 우리밀과 달리 통밀을 사용해서

특유의 고소한 맛이 다크럼과 잘 어울린다.


바닐라빈과 생무화과를 넣어 만든

콤포트가 올라가고

은은한 꽃향이 나는 타히티 바닐라빈을 사용해

바닐라크림을 만들어 올렸다.


타르트 안으로는

아몬드크림을 넣어 구웠는데

다크럼을 듬뿍 넣어 향을 더하고 생무화과를

콕콕 박아 구운 후에 다크럼을 시럽처럼 덧발라

만들었다.


달달한 바닐라크림과 은은한 무화과

고소한 통밀 타르트 지를 향긋한 다크럼이

조화롭게 이어준다.

마무리로 올린 허브들( 딜/ 세이지)은

처음 입안에 넣을 때 푸릇한 향으로 가득하게 만든다.


무화과는 최대한 진한 맛이 났으면 해서

청무화과 홍무화과 두가지 종류를 사용했다.

아무래도 청무화과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수 없어서

수급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두가지 무화과를

사용할수 있어 기뻤다.


청무화과는 함평에서 재배한 무농약 무화과를

사용했는데 크기도 작고 상처도 많지만

청무화과 특유의 쫀득한 식감과

진한 향이 좋아서 이 농장의 무화과만 사용했다.


다음에 또 무화과를 사용해서 한다면

청무화과만 사용해서 작업해보고 싶다.


.

.

.



무화과는 맛과 향이 진하지 않아서

과자를 만들 때 항상 어렵다고 느꼈던 과일이었다.

역시나 이번 가을뜰을 준비하면서

많은 테스트를 했어야 했는데

이번 과자를 통해서 무화과의 매력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은은한 무화과 그 희미한 맛이 여러 향과 만나면서

무화과맛이 진해지는 그 순간이

이번과자의 매력이 아니었을까?


희미한 날들과 희미한 맛의 무화과

모호한 날들 속에서도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아가는


이번의 과자가 오셨던 분들께

조금은 반짝이는 순간이 되었기를 바라며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희미한 날들 속에서

어렵고 어려웠던 나의 가을뜰 秋, 庭








푸르른 녹빛의 녹음은

서서히 금빛으로 번지고


찬란히 부서지는 햇살 아래

자신의 색으로 물들어가는


가을  뜰:秋, 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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