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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보리 May 10. 2024

가죽나무는 결국 살아냈다.

어쩌면 시골 텃새의 희생양.


죽을 줄 알았던 가죽나무가 살아났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만 있어 죽은 건지, 살아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잎이 나왔다. 상처는 사람의 흉터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일 년 동안 가죽나무는 애를 썼고 살아났다.


작년 이맘때였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데 대문가에 있는 가죽나무가 뭔가 이상했다. 서둘러 마당에 주차를 하고 나가보니 누가 가죽나무껍질을 빙 둘러서 잘라냈다. 그건 나무를 죽이기 위해서 하는 거였다. 화가 났다. 남의 집 대문가에 있는 멀쩡한 나무를 왜 이렇게 해 놨는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모양을 맞춰 조각을 잘 끼워서 랩으로 칭칭 감았다. 가죽나무가 죽지 않길 바랐다. 껍질을 토닥여줬다. 그래도 화는 삭이지 않았다. 왜 남의 집 대문가에 있는 나무를 죽이려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남편에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경찰에 신고할 까 생각도 해 봤지만 시골동네에서 시끄럽게 할 수 없어 우선 참았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이라 우리 집이 아니니까 주제넘은 일인가 싶기도 했다.


범인은 의외로 금방 나타났다. 며칠 뒤 아랫집 아저씨가 지나가며 자신이 그랬다고 했다. 우리 집은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고, 비탈길 아래에 그 아저씨 집이 있는데 지붕 빗물받이에 가죽나무씨앗이 자꾸 들어와서 물구멍을 막는 게 이유였다 하셨다. 가죽나무 열매는 손가락 한 마디정도 크기에 제법 딱딱해서 포도송이같이 여러 개가 달려있다. 하지만 어이가 없었다. 왜냐면 그 집 뒤에 작은 가죽나무가 있고, 감나무도 있으며, 바로뒤가 산이고, 옆집에는 큰 호두나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빗물받이를 막는 게 가죽나무뿐이었을까?


그 아저씨는 처음부터 우리의 인사를 받지 않았다. 바로 앞에서 인사를 해도 빤-히 쳐다보고 지나갔다. 그래도 우리는 마주치면 인사를 했고,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어디서 왔냐고 말을 거셨다. 남편의 고향이 문경이라는 걸 듣고 아버님이 어디에 사시는 지를 묻고 나서야 조금 아는 체를 했다. 그래도 여전히 때때로 인사를 안 받으셨고, 그 집의 자식들도 마찬가지로 인사를 먼저 하는 건 고사하고 인사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이런 게 텃세구나 싶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진 않았다. 인사를 잘 받지는 않으셨지만 우리 집 가죽나물을 따다가 걸리기도 하셨고, 가을에 호두를 털다 잠깐 시댁에 다녀온 사이 털어놓은 호두를 누가 몽땅 주워갔을 때도 의심은 갔지만 가만히 있었다. (우리 집은 길 끝에 있는 마지막 집이고, 우리 집 뒤로 아랫집 아저씨 사과밭이 있어서 우리 집 앞으로는 그 집 식구들만 지나다닌다.)


처음부터 우리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이게 ‘텃새’라 부르는 그런 일들일까 고민했다. 결국 가죽나무는 텃새의 희생양 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가죽나무는 볼 때마다 화가 났다. 대문가에 죽은 나무가 서 있는 게 너무 싫었다. 열매가 너무 떨어지면 가지를 좀 쳐 달라고 말을 해도 충분할 걸 제멋대로 나무를 죽이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껍질을 도려내면 나뭇잎으로 물이 올라가지 않아 서서히 나무가 말라죽어간다. 역시나 가죽나무는 여름이 돼도 잎이 시원치 않았다. 평소에 무성하게 나던 잎이 듬성듬성 나 있었고, 잎도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가죽나무를 볼 때마다 아랫집 아저씨를 신나게 욕했고, 겨우내 아주 독한 제초제 원액을 뿌려 쥐도 새도 모르게 아랫집 감나무를 죽게 해야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남편과 감나무 제거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겨우내 앙상한 가지를 보며 가죽나무가 살았을까 죽었을까 생각했다. 영영 새 잎이 나오지 않는다면 커다란 나무는 대문가에 가지만 앙상하게 서 있게 될 것 같아 슬펐다. 봄이 되었는데도 순이 나오지 않았다. 두릅이 나온 지 좀 됐는데도 가죽나무는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가지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도려낸 조각을 감아둔 랩이 찢어져 있었다. 일 년이나 되었으니 삭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랩을 떼어냈는데 조각 사이로 새 살이 올라와 있었다. 마치 사람 몸에 난 흉터처럼 새로운 나무껍질이 블룩 하게 채워져 있었다. 나무 끝을 올려다보니 중간쯤에 있는 가지에서는 잎이 안 나왔는데 나무 끝쪽에 있는 가지에서는 새 잎이 나오고 있었다. 기특하고 반가웠다. 신이 나서 가죽나무가 살았다고 소리쳤다.


역시 생명은 강했다. 가죽나무는 겨우내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싶어 대견했다. 나무 기둥에 큰 상처가 생겼지만, 죽지 않았으니 됐다. 또 한 번 가죽나무를 제거하려 든다면 감나무를 정말 제거할 테다. 히히-



누군가 가죽나무껍질을 도려냈다.


그래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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