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직원인 크리스털은 인도 계열의 사람으로 키가 크고 깡마른 체형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인사를 건네고 무거운 나의 가방을 거침없이 아파트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파트 구석구석을 돌며 이것저것 설명을 하였고 쓰레기 분리수거 방법과 전력이 떨어졌을 경우 체크해야 할 아파트 내부의 차단기와 지하에 있는 두꺼비집까지 상세한 설명을 마쳤다. 2개의 주출입구를 통과할 때 필요한 열쇠, 또 다른 중간문을 통과할 때의 열쇠 2개, 그리고 나의 아파트 열쇠, 재활용품실 열쇠, 전기실 열쇠 등등 총 6개의 열쇠꾸러미가 나의 손에 쥐어졌다. 그녀를 배웅하고 나는 간단히 샤워를 마쳤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이 공간의 한기와 낯섦에 어색해하며 극도의 피곤함이 밀어 넣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나는 덮고 있는 이불 위에서 서걱거리는 냉기를 느꼈다. 어두운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아 방의 불을 켰다. 나는 크리스털이 따끈하다며 확인시켜 주었던 거실의 라디에이터를 만져보았다. 차갑다. 침실로 돌아와 라디에이터를 찾아보았다. 창 밑에 좀 작은 것이 달려있다. 역시 냉기가 흐른다. 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옷장에서 무릎까지 내려오는 경량 패딩을 커내어 입었다. 도저히 찬기를 이길 수 없어 두꺼운 패딩으로 바꿔 입고서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아침이 밝으면 크리스털에게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해야겠다.
이상하다. 아침에 라디에이터를 만져보니 따뜻하다.
‘중앙난방 형식이라 난방 시간이 정해져 있구나’
크리스털에게 물어보니 밤에는 난방이 꺼지는데, 이탈리아 사람들은 “사람이 잘 때는 건물도 쉬어야 한다”라고 생각한단다. 난생처음 듣는 신박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저 라디에이터는 낮시간조차 난방기능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물건이었다. 괜스레 벽에 매달려 저 혼자 열을 내고 있다. 바로 코 앞에서 서 있어도 온기가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이 잘 때는 건물도 쉬어야 한다”
크리스털의 이야기가 머리에 맴돌았다. 한 겨울 하루 종일 난방기능을 한 건물도 밤에는 쉬어야 한다는 것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설명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복잡한 설명 없이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아마 전력수급에 문제가 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에너지문제나 환경문제, 자원, 생태계 문제를 거론하며 이야기했다면 좀 더 설득력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건물은 당연히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우리에게는 낯선 표현이지만 사람을, 함께 살아가는 주변 환경과 동등한 존재로서 보는 그들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모르고 지낸 환경에 놓여 이곳을 이해하고 살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반대편으로 걸어가 보아야 한다.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너의 곁으로 가서 내가 있었던 곳을 바라보면 네가 보고 있는 나의 모습이 보이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너를 보면 비로소 그전과는 다르게 보이는 너를 발견하게 된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나는 너를 모르고 너는 나를 모른다”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내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너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너의 한 가지 모습 밖에는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너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바라는 모습만을 기다렸기 때문에 어쩌면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내가 평생 살아본 적 없는 이 낯선 곳에서의 첫 날밤은 꽤나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겪게 될 수많은 일들에 마음을 열어주는 사건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정말 상상도 못 했던 일이야라며 호들갑을 떨겠지만 적어도 어떤 일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해 쉽게 단정하고 판단하지는 않으려고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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