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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Aug 16. 2016

10일 간의 동거

안녕, 짜왕아.

방문을 열고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빨래와 함께 철푸덕 엎어져있는 빨래 건조대였다. 찬찬히 눈을 돌렸다. 곽 티슈가 찌그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고, 행거에 걸려있던 원피스는 책상 밑에 널부러져 있다. 원피스를 걸려고 행거 근처에 다가가자 다른 참상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합피로 만들어진 가방을 신나게 긁어놓았네. 전남친이랑 맞춘 커플 가방이라 앞으로 멜 일이 없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리고... 이 냄새. 설마, 설마. 울고싶은 마음 겨우 부여잡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았다. 좀 포근하라고 박스에 깔아놨던 수건에서 지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부스럭, 행거 구석에서 작은 몸뚱아리가 숨을 곳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하..." 그 순간, 내가 욕할 수 있는 건 하나 뿐이었다. 망할 놈의 오지랖!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기본적으로 '오지랖 세포'란 게 없는 사람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남의 일에는 "아, 그렇구나" 고개 몇 번 주억거리고 돌아서버리는 개인주의자란 뜻이다. 하지만 지금의 이 사태는 다 그 자식 떄문이다. 너무 안 써서 퇴화돼버렸던 '오지랖 세포'가 벌떡 일어나 사고를 친 것이다.


사실 요즘 조짐이 보이긴 했다. '내 코가 석자'를 모토로 이십 몇 년을 살아온 내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식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피가 안 섞인 정도인가. 종 자체가 다르다. 평소엔 '냥냥' 울며 짜증날 땐 '낑! 힝! 잉!' 소리를 내는, 내가 부를 땐 쳐다도 안 보면서 제가 내킬 땐 펄쩍 뛰어 몸을 부비는 고양이 퐁이. 그동안 "난 애 낳으면 자유방임형으로 키울 거야. 지들 인생 지들이 알아서 해야지."라고 떠들고 다녔던 게 무색하게 나는 '팔불출 퐁이맘'이 되었다. 내 새끼가 똥은 잘 싸는지 매일 체크하고, 개구호흡을 하자 분당 심박수를 재고 앉아있는.


야, 이쁘면 다야? ㅇㅇ 이쁘면 다임


고양이란 생명체가 마음에 각인된 후, 길고양이들에게도 괜히 눈길이 갔다. 예전엔 고양이를 마주치면 무서워서 빙 돌아갔는데 이젠 "안녕" 인사를 하고, 길고양이들의 뚱뚱한 몸매가 사람 음식의 염분 때문이란 걸 알게된 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유없이 고양이를 걷어차거나 쥐약을 놓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해마다 얼마나 많은 개와 고양이들이 버려지는지 퐁이를 사랑하면서 알게되었다.


"몇 개월간 밥 주던 아이가 새끼를 낳았는데, 어느 날 끈끈이가 범벅된 채 발견됐어요. 구조해서 한 달간 동물병원에 있었는데, 병원 리모델링으로 당장 갈곳이 없어졌습니다. 거처가 없으면 포항에 있는 보호소로 가야 해요."

몇 번을 반복해서 읽다 쪽지를 보냈다. 몇 마리씩 키울 깜냥은 못 되지만, 잠깐 방 한 칸 내주는 건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쪽지가 다섯 번 정도 오갔다. 한 달 넘게 호텔링 비용을 감당했던 구조자는 안락사 시키지 않는 보호소로 보내는게 최선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임보처는 말 그대로 '임시' 거처일 뿐 구조자의 부담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그 순간, 박차고 일어났다. 이불 둘둘 말고 숙면 중이었던 오지랖 세포가.

"제가 한 마리 정도는 케어하고 입양 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자신이 없어졌다. 나 친구도 별로 없는데. 요즘 아깽이 대란이라던데, 입양 갈 수 있을까? 이러다 우리 집에? 억, 안돼!






그 다음 날,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왔다. 코 부분에 하이라이터를 대담하게 칠하고, 까만 몸에 흰 양말을 앙증맞게 챙겨 신은. '고양이 작명소'를 자처하는 남자친구가 '짜왕'이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짜장 중에 왕이라니, 크게 될 이름이로다.

순진한 네 눈빛에 속았던 거야



그리고 실제로 녀석은 정말 크게 될 놈이었다. 사람 걷는 바닥으로만 걸어다니는 퐁이와 다르게 못 올라가는 곳이 없었고, 정말 잽쌌다. <왕의 남자>에서 줄 타기 하는 공길이처럼 행거 가로봉을 아슬아슬하게 걸어다니는 게 취미, 냉장고 뒤나 세탁기 뒤 등등 온갖 구멍에 들어가는 게 특기. 내가 그동안 고양이를 쉽게 키웠구나. 똑똑하긴 더럽게 똑똑해서 화난 목소리로 "짜왕아!" 부르면 꽁꽁 숨어 귀 한쪽도 내보이지 않았다.

퐁이와의 합사도 쉽지 않았다. 처음 짜왕이를 본 퐁이는 생전 처음 하악질을 시전했고, 제 몸의 반도 안 되는 애를 솜방망이로 후두려 패기에 이르렀다. 고양이들 서열 싸움에 간섭하는 거 아니래서 격리와 합사를 반복하며 지켜봤는데, 시간이 지나니... 이게 웬걸. 퐁이의 방망이질에 열 받은 짜왕이가 매섭게 눈을 치켜뜨며 "하악!" 반격. 퐁이는 큰 눈을 꿈뻑꿈뻑 하더니 깨갱 돌아서고 말았다.


전쟁같은 일주일이 지났다. 퐁이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짜왕이는 집을 활보하고 싶은데 못하게 하니까 화가 났다. "애오옹!" 새벽마다 목청껏 우는 바람에 이웃들이 쫓아올까 잠을 설쳤다. 문을 열어주면 으르렁거리며 싸움이 붙고 바닥을 쿵쿵 구르며 뛰어다녔기에, 역시 이웃들의 눈치가 보였다. 


지인이 많은 선배에게 입양 홍보를 부탁했다. 구원의 손길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왔다. 같은 층에서 일하는 회사 분이 기르고 싶다고 하신 거다. 장점보단 단점을 알려드렸다. "짜왕이 행거 되게 잘 타요. 옷 뜯어놓고, 가방도 벅벅 긁어요. 괜찮...으시겠어요?" "노트북 부수는 거 아니면 상관 없어." 너그러운 대답에 마음이 놓였다. 지금은... 짜왕이의 파괴력을 안 이상 안전한 곳에 노트북을 두셨을 거다. (그래야 한다.)


입양 가기 전 날 밤, 늘 격리해놨던 방문을 열었다. 싸우기도 하고 놀기도 하며 치고 박던 두 고양이는 11시가 넘어가자 몸에 힘을 풀고 널브러지기 시작했다. 짜왕이는 내 침대 옆에 난 창문 틀에 자리를 잡았다. 녀석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의 손길을 무서워해서 나도 부러 잘 만지지 않았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쓸었더니 짜왕이가 눈을 감았다. 미간을 쓰다듬는 걸 한참 느끼던 녀석은 내 침대 위로 풀쩍 올라와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자세를 바꾸려고 몸을 뒤척이자 화들짝 놀라 도망가긴 했지만.


다음 날엔 아주 진귀한 풍경을 보았다. 화장실, 사료, 모래... 짜왕이의 물건을 챙기고 있는데 퐁이가 짜왕이의 몸을 정성스럽게 그루밍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짜왕이가 가는 걸 아는 걸까? 평생 주인에게 가는 길, 예쁘게 단장해준 것이었을까? 짜왕이는 케이지에 실려 차로 이동하는 동안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너도 아는 거겠지? 이제 진짜 집으로 간다는 걸. 까칠한 누나도 없고, 이해심 부족한 인간도 없는 너의 세상으로. 사실 처음엔 방 한 켠만 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과 노력도 쏟아야 했다. 그래, 그건 오지랖 세포를 너무 썩힌 죄로 내가 잊고 있던 사실이었다. 사람이든 고양이든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는 걸. 힘들지만, 그게 참 재밌는 일이라는 걸 말이다.

 


퐁이는 짜왕이가 간 후, 긴 잠에 들었다. 일어나선 예전처럼 창문틀에 앉아 고독을 즐겼다. 긴 꿈같은 열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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