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8억짜리 집의...
내 오래된 친구들에게 변화가 잦은 요즘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결혼 안 할 거야”를 입에 달고 살던 김모씨가(땅콩집에서 같이 살자고 나를 꼬시기도 여러번이었다) 예식장을 잡았고, 공부에 정말 취미가 없던 남모씨는 석사 학위를 따기 위해 논문 준비에 한창이다.
“이번에 집 계약 끝나면 그냥 집 사버리려고.”
그리고 스무 살에 만나 2500원짜리 학식을 먹으며 우정을 다져온 최모씨는 곧 집주인이 될 예정이다. 결혼 2년차. 아직 주변에 ‘유부’가 희귀한지라 그녀의 신혼 토크를 듣는 재미가 쏠쏠한데, 이번 만남에서는 집을 사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세상에. 신용카드도 무서워서 체크카드만 쓰는데, 집을 사려면 얼마를 빌려야 하는 거야.
“집 사는 거 좀 무섭지 않아? 돈이 너무 크잖아.”
“그렇긴 한데… 2년마다 이사 비용도 만만치 않고. 어차피 사야될 거 빨리 사서 부지런히 갚으려고.”
의연히 말하는 친구가 퍽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하긴, 스무 살이 되자마자 학자금 대출을 기웃거리며 이미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지. ‘어른’과 ‘빚’은 영원한 동반자란 사실을.
그래도 집을 구매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무게다.
매일 언덕 꼭대기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이자와 원금을 등에 이고 죽을 동 살 동 올라가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힘들다고 중간에 좀 쉬었다간 무거운 빚이 엄청난 속도로 굴러와 인생을 깔아 뭉개버릴 것 같은 느낌. 어린 나이에 그 짐을 지기로 자처한 친구에게 존경의 눈빛을 쏴주었다. 친구는 이따가도 남편과 부동산에 가기로 했다며, 요즘 집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고 말하며 덧붙였다.
“요즘 집 진짜 비싸. 막 8억씩 해.”
히익…. 몸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 놀라움이 리트머스 종이처럼 얼굴에 고대로 드러났을 것이다.
“파, 팔억?”
입술이 떨리는 바람에 말도 버벅였다. 하지만 별 거 아니라는 듯 받아칠 수 있는 스케일이 아니었다. 8억 짜리 집을 보고 있다니. 나는 꿈에서도 범접하지 못한 숫자인데. 8억. 8억! 8억? ‘8억’이라는 글자를 입안에 넣고 다른 뉘앙스로 몇 번이나 굴려보았지만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친구와 친구 남편 모두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둘의 경제 능력을 고려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방향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있겠지. 납득이 되면서도 ‘8억’의 얼얼한 충격은 쉬이 가시질 않았다.
간과하고 있었다. 시지프스의 바위도 능력 따라 무게가 정해진다는 것을. 나는 8억짜리 바위를 밀어 올리고 싶어도 은행에서 허락해주지 않을 터였다. 순식간에 온갖 생각들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회사 다닌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잘 버는구나, 부터 시작해서 5년 뒤 여전히 작은 전세방에 살고 있는 나와 친구를 3D 프린터로 찍어내 온갖 시뮬레이션까지 진행하게 되더라. 마지막엔 결국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게 됐다. 그때도 이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부동산 앱을 켰다. 12월에 계약 기간이 만료인지라 나도 집을 알아봐야 했다. 내가 가진 돈에서 최고로 대출을 받는다고 가정해 전셋집을 검색해보았다. ‘반지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스크롤을 내려도 마찬가지였다. 반지하, 반지하, 반지하…. 신경질적으로 핸드폰 화면을 꺼버렸다. 내가 햇볕과 나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망할 놈의 서울!
아, 나 왜 이렇게 못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