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
친구네 집 창문 난간에 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다. 한 마리는 알을 품고 있었고 다른 한 마리는 지붕 위에 앉아 사주 경계 중이었다. 늘 걸어 다니는 모습만 봤는데. 너도 높이 날아오를 줄 아는 새였구나. 이따위 감상을 내뱉는 내 옆에서 친구는 사색이 된 채 다리를 떨고 있었다. “주인아줌마가 쟤네 같이 치우자는데 어떡하지? 방으로 확 들어오면 어떡해?”
<동물농장> 애청자인 나는 얼마 전에도 청솔모가 에어컨 실외기 사이에 둥지를 튼 사연을 감명 깊게 본 바 있었다. 그 집의 가족들은 무척 감격스러워했으며, <동물농장>은 늘 그랬듯이 청솔모가 성장한 새끼들을 데리고 야생으로 돌아가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포착해냈다. 인간과 동물의 아름다운 공존, 대충 이런 뜻의 내레이션이 깔리며 훈훈하게 마무리됐었는데….
비둘기의 선택을 받은 친구의 얼굴엔 환희 따위 없었다. 창밖에서 울려 퍼지는 커다란 ‘구구구-’ 소리와 조류의 앞모습을 보았을 때 느끼는 위화감에 압도돼있을 뿐이었다. 자꾸 비둘기와 눈이 마주쳤다고 주장하는 친구를 진정시키기 위해 인터넷을 켰다. 우리는 늘 답을 찾아왔고, 그 답은 대체로 인터넷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블루오션을 발견했다. 실외기나 베란다에 생긴 비둘기 둥지만 치워주는 전문가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이름은 다소 살벌한 ‘버드 스나이퍼.’ 물론 총을 쏘는 건 아니고, 배설물을 포함한 비둘기의 흔적을 치운 후 다신 돌아오지 못하게 망과 뾰족한 스파이크를 설치해준다고 했다.
여기서 막간 비둘기 TMI. 비둘기는 귀소 본능이 강해서 아무리 먼 곳에 떨어뜨려놔도 원래의 집을 찰떡같이 찾아낸다고 한다. 창세기 8절엔 노아가 땅이 얼마나 말랐는지 알아보기 위해 방주에서 비둘기 한 마리를 내보냈고, 저녁때쯤 올리브나무 이파리를 물고 돌아왔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다. 후각을 이용한다, 지구 자기장의 미묘한 변화를 느낀다 등 귀소본능의 원천에 대한 설도 다양하다. 푸짐한 풍채로 보도블록을 걸어 다니는 모습이 익숙해서 그렇지, 사실은 히어로 급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특성 때문에 한 번 그곳에서 나고 자란 비둘기들은 끊임없이 돌아와 소음과 배설물을 투척하는 모양이었다. 이에 고통 받는 사람들이 SOS를 치는 곳이 바로 비둘기 퇴치 업체고. 봄만 되면 맘 카페에 비둘기 때문에 미치겠다는 글이 연이어 올라오는 걸 보면 계절은 좀 탈지 몰라도 수요는 확실해보였다.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가 최대의 고민인 31세 마감 노동자에겐 비둘기의 귀소본능보다 비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직업이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친구 역시 ‘고양이 탐정’ 다음으로 신기한 직업 같다며 감탄. 비둘기 둥지 치우는 일을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정한 최초의 선구자는 누구였을까. 어두운 등잔 밑의 수요를 기가 막히게 찾아낸 자본주의의 총아. 비둘기를 조류계의 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진입장벽 또한 은근 높아보였다.
<부의 추월차선>으로 유명한 엠제이 드마코는 “당신이 시작하기 쉬운 일은 남도 시작하기 쉽다”고 말했는데, 글쓰기가 딱 그렇다. 비싼 재료가 없어도 꼭 전공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쓸 수 있고, ‘잘’ 쓸 수 있다. 트위터에만 들어가도 필력과 재치로 무장한 이들이 가득한 걸. 회사를 다니면서 심금을 울리는 글을 써내는 작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요즘처럼 모두가 크리에이터인 콘텐츠 무간지옥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니 글쓰기가 유일한 기술인 나는 미래를 떠올릴 때마다 눈앞이 캄캄해 오돌오돌 오돌뼈가 될 지경이다.
유병장수가 최고의 욕이라는 100세 시대에 오래오래 일하려면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데. 나는 회사에서 고작 베어링 89쯤 되는 것 같다. 매일 글을 쓰면서도 글쓰기 말고 잘 하는 게 뭔지 고민하지만, 그런 게 있었다면 31년 동안 몰랐을 리가 없지! 솜사탕 녹듯 닳아버리는 에너지를 회사에 몰빵한 뒤, 침대에 누워 주변 ‘N잡러’들의 사이드 프로젝트에 ‘좋아요’나 누르고 있을 뿐이다.
역시 이렇게 불편의 틈새를 노려야 하는데. 그래, 난 30만원 내도 좋으니까 저 비둘기가 우리 집에 좀 안 왔으면 좋겠다. 이런 일이 또 뭐가 있지? 일본에선 퇴직 대행사가 유행이래. 야, 대행을 또 하고 싶냐? 비둘기로 시작해 대행사의 슬픔에 당도한 대화의 끝에 주인아주머니가 도착했다.
강단 있는 인상의 아주머니는 빗자루와 커다란 대야, 살충제 3종 세트를 들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친구가 방금 알게 된 비둘기의 귀소 본능을 설명하며 전문가를 부르는 게 낫지 않느냐고 제안했지만 단번에 기각. 거침없는 손길로 베란다 문을 열어젖혔다. 지붕 위에서 서슬 퍼런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대장 비둘기가 출타를 나간 참이었다. 함께 먹이를 구하러 간 건지 둥지도 비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빗자루를 들곤 난간에 있는 둥지를 쓸어내렸다. 터프하고도 정확한 손놀림이었다. 멀리서 정성스럽게 물어 날랐을 지푸라기와 새끼인지 알인지 모를 것들이 대야로 쏟아졌다. 마지막으로 살충제를 난간에 듬뿍 분사한 후, 아주머니는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10분도 안 되어 완료된 비둘기 둥지 제거 작전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좀비들과 싸우는 최후의 지구인들처럼 긴박한 사투를 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쉽게 끝나는 거였어? 인터넷에 올라온 그 절절한 후기들은 뭐였고? 버드 스나이퍼의 전문성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집주인의 의지 앞에선 발휘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역시 세상에 대체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는 것이다.
며칠 뒤 친구가 우는 모양의 이모티콘을 잔뜩 보내왔다. 둥지를 잃은 비둘기들이 인류의 멸망을 기원하듯 매일 목청껏 울고 있다고 했다. 살충제가 마른 난간에 앉아 있는 엄마 비둘기와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무서움 반 미안함 반,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 문득 옛날 옛적 <동물농장>에 출연했던 (믿거나 말거나)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가 떠올랐다. 그런 능력이 있는 분들은 비둘기 설득업에 종사해보시면 어떨지. 주택에 자리 잡은 비둘기들을 설득해 다른 곳으로 보내준다면 그야말로 100세까지 가능한 전천후 직업이 될 것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