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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May 15. 2022

각성제는 필요 없어

다큐멘터리 <미스 아메리카나>


여성들에게 특히 엄격하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기.’ 상냥한 말투가 아니거나 조금이라도 웃음에 인색하면, ‘기분권’을 해쳤다는 죄목으로 ‘예민한 애’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그러므로 본의 아닌 쿠션어들을 남발하게 되죠. 완곡하게 말하기 위해 검열을 거듭하다 그냥 입을 다물기도 하고요.


심지어 ‘국민 여동생’이라면 어떨까요? 6살 때부터 컨트리 음악을 시작해 미국인들의 TV 안에서 성장한 ‘미스 아메리카나’ 테일러 스위프트는, 모두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지 않길 택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대중의 기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미워하는 마음에는 대개 논리가 없죠.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비정한 점은 한 사람을 무너뜨린 사건과 루머까지도 즐길 거리로 치환된다는 겁니다. 여성 아티스트에 대해선 더욱 가혹하게요.


테일러 스위프트가 라디오 DJ에게 성추행 당했다는 소식 역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습니다. 1년간의 법정 공방. 무려 7명의 목격자와 사진까지 있었는데도 치욕스러운 과정이 반복되는 걸 겪으며 그녀는 의문을 품습니다. 만약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강간을 당했다면 내 말을 믿어줬을까? 보통의 여자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이 해로운 세상에서 존엄성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는 결심합니다. 미움 받을 용기를 딛고 목소리를 내겠다고요. 2018년 중간선거 시즌, 테일러 스위프트는 데뷔 12년 만에 처음으로 1억 명이 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에게 민주당 지지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여성과 소수자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공화당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기 위해서요. 안전을 이유로 만류하는 가족들에게 그녀는 힘주어 말합니다. “확실한 건 이게 옳은 일이라는 거예요. 역사에서 옳은 길을 택해야 해요. 이기지 못해도 노력은 한 거니까요.” 그리고 글을 올린 지 24시간 만에 미국 전역에서 투표 등록자가 5만 여명이 늘어났습니다.


테일러 스위프트가 겪었듯, 각성의 계기는 대부분 세상에 대한 환멸과 함께 찾아오죠. 하지만 자신의 변화를 노래에 꾹꾹 담아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새삼 깨닫게 되더군요. 누군가의 성장만큼 보는 사람을 고무시키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요. 재능과 용기를 갖춘 아티스트와 동시대를 살며 느끼는 기분 좋은 자극. 앞으로도 우리를 깨우는 것이 이런 것들이면 좋겠습니다. 불행에서 비롯된 각성이 아니라요.


그녀가 처음으로 소신을 밝힌 2018년 중간선거의 결과는 패배였어요. 하지만 테일러 스위프트는 주저앉는 대신 젊은 우리를 위한 가사를 썼습니다. 이번엔 졌지만, 우리는 달려 나갈 수 있다고요. <미스 아메리카나>의 엔딩 크레딧에 흘러 나오는 노래, ‘Only the young’입니다


‘You were outnumbered, this time / But only the young / Only the young can run / Can run, so run and run and run. (네가 이번엔 수적으로 열세였어. 하지만 오직 젊은 사람들만이 이끌어갈 수 있어. 그러니 달려, 달리고 계속 달려.)’


https://youtu.be/92QNKICmCn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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