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을 해야 끝이 나려나
무려 5개월 전에 티켓을 결제했고,
숙소와 열차, 렌트카까지 차근차근
제법 두서있게 미리미리 준비해왔다.고
생각했다.
그 덕분에 가기 전날 밤엔 여유롭게 책을 뒤적이며 배를 깔고 있을 줄 알았다.
착각이고 교만이었다. 이런.
하루 종일 여행 준비에 동동거리는 나를 보고 있자니 웃음도 나고 짜증도 난다. 도대체 5개월 동안 뭘 했던 걸까.
렌트카 픽업과 반납 시간이 잘못 예약되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발견했고,
(예약변경 메일을 황급히 보내긴 했는데 지나치게 임박한 경우라 변경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가능은 하겠지만 수수료 타령을 할 가능성이 높다. )
미리 해두어도 아무 이상 없었을 환전을 오늘에서야 하느라 굳이 한껏 올라있는 환율에 기겁을 하고 말았다. 오늘따라 은행에 손님은 왜 그리 많고, 직원들은 일처리가 늦은지 환전 안하고 그냥 출발하고 싶었다.
(결국 하긴 했다. 미리 조금만 알아봤어도, 은행앱에 깔린 환율우대쿠폰을 준비했을텐데 그 조금이 부족하여 계획에 없던 신용카드 한 장을 발급받고서야 수수료 90프로 우대 고객이 되었다.
경유 시간을 제외한 총 비행 시간만 무려 열일곱 시간이라는 것도 5개월 전 티켓 결제할 때 알고 있었다. 목베개가 필요하리라는건 어제 깨달았고 부지런히 검색했지만 출발 전에 우리 집에 가져다줄 수 있는 쇼핑몰은 없었다. 이마트 개장 시간에 황급히 달려가 매장 전체를 샅샅이 훑어 결국 찾아내긴 했지만 원하던 디자인은 아니었기에 도대체 5개월 동안 뭘 했냐. 하는 자문을 안할 수가 없다.
육아랑 여행준비가 얼핏 비슷한 느낌이 든다. 각자의 장단이 있긴 하지만 끊임없는 검색과 정보로 열심을 내어보아도 놓치고 부족한 부분이 없을 수 없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즐거운 순간을 기대하며 계획하고 시작하지만 항상 즐겁지만은 않다. 아니, 힘든 순간이 어쩌면 더 많을 것이다. 그것뿐이랴. 더 잘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내내 함께할 것이고, 사진에 담고 싶은 눈부신 순간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사진과 영상 속의 그 때 그 순간을 그리워하고 정말 좋았어.. 뒤늦은 아쉬움이다.
연년생 두아이를 온전히 내 한 품으로 길러내던 시절, '그 때가 제일 좋은 때'라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주둥이를 그냥 쎄게 한 대 후려치고 싶었다. 말이야 방구야. 지금이 제일 좋은 때라면 더 살아갈 이유는 없어보였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던 내가 똑같은 시간 속에 우울해 미쳐버리려고 하는 친정 여동생에게 그 소리를 하고 있다. 다행히 카톡으로 한 말이라 눈 앞에서 주둥이를 얻어맞는 일은 피했지만. 그런 말은 속으로만 하는거다. 제일 힘든 때라고 점점 좋아질거라고 맘에 없는 위로를 따뜻하게 건넸어야 하는데 이놈에 심보.
여행 준비 내내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정말 좋겠다.' 투성이였다. 렌트카 예약 문제로 담당자와 얼마나 많은 변경 메일이 오고 갔었는지, 숙소를 검색하느라 눈이 팽팽 돌아가고, 영어로만 씌여진 싸이트에서 기차를 결제하며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그들은 모른다. 사실, 아무도 모른다. 이 정도쯤은 공유했어야할 남편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결국 모든 어려움은 당사자의 몫인걸. 어려운 육아 시절 내내 남편은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아기 아빠의 샘플 그 자체였지만 그가 내 모든 고단함, 지치고 외로움, 자책까지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여행 준비도 그렇기에 '그럭저럭 잘 되고 있어'라는 말로 적당히 둘러댔을 뿐, 여행을 안 가고 싶어질 만큼 짜증나고 짐스럽고 즐겁지만은 않은 순간이 있었다는건 내색하지 않았다. 깃발을 들기로 한 이상, 이런 감정들조차 내 몫이다.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에게 '여행 준비할게 너무 많고 힘들다''는 불평을 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부끄러워졌다. 좋지 않은 가계부 사정에도 과감하고 무리하게 여행을 결정하고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을 때의 설렘과 감사함은 잊혀진지 오래. 각종 예약과 준비물 구입으로 너덜너덜해진 나는 급기야 내 여행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붙잡고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참 못났다, 못났어.
아이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부부 앞에서 아이가 얼마나 귀찮고 힘들고 짜증나는 존재이며 아이 때문에 삶이 얼마나 더 무거워졌는지 불평하고 있는 철없는 애기 엄마가 된 느낌이었다.
어린 두 아이들과 어려운 형편으로 지난 몇 년간 해외여행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전, 일년에도 수차례 드나들던 공항이 너무 그리워 남편과 아이들을 끌고 결국 공항에 갔다. 공항 냄새를 맡고, 여행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비행기가 가장 잘 보이는 어느 식당 창가에서 아이들에게 비행기를 실컷 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는 저 비행기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눈물나게 부러워했었다. 그랬던 나였는데, 몇 년만의 여행에, 그것도 비싸서 못가고 멀어서 잘 못가는 유럽 여행 가면서 불평이라니. 이러면 안되는거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