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위 게임

by 밈바이러스
알랭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원제를 살펴보면 <Status Anxiety>로, 지위 불안입니다.



지위 게임 이론: 세상의 기본 원리

우리는 모두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안정감을 얻고 싶어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실 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 내에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투쟁하는 게임. (최소한 안정적인 지위에 안착하고 싶어 합니다.) 왜일까요? 높은(혹은 안정적인) 지위에 있다면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자원(음식과 매력적인 이성)에 대한 접근력과 통제력이 올라가며, 사회적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식이 3억 년도 더 된 바닷가재에게도 나름의 지위를 계산하는 원시적인 신경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의 집게와 나의 집게 크기를 비교합니다.) 동물의 지위 다툼은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서, 상대방의 능력과 입지를 빠르게 추론해서, 상황에 맞게 대응하도록 하는 복잡한 정보 처리 과정을 거칩니다. 이로써, 불필요한 물리적 충돌을 줄여 안정적인 사회 서열을 형성할 수 있습니다. (동물 사회에는 병원이 없습니다. 물리적 충돌은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 역시 눈 깜빡할 짧은 시간에 상대방의 지위를 추론하는데 능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위 게임에 참여한다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을 지위 게임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위 욕구는 인간의 궁극적 동기(Ultimate Drive) 중 하나입니다. 학생들이 왜 그렇게 열심히 입시 공부를 할까요? 기왕이면 좋은 대학(또래 학생들 간 대학 타이틀을 건 지위 게임. 남들을 따라서 공부했다고 할지라도, 낮은 지위를 피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 것입니다)에 가서 좋은 곳에 일자리를 얻으려고(사회 경제적 지위 게임) 했을 것입니다. (공부에 열성인 부모님의 닦달로 가족 내에서의 지위를 위해 공부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학생이 있다면, 그는 대학 타이틀을 건 지위 게임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대신에 다른 지위 게임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을 겁니다. 왜 자신을 그렇게나 열심히 꾸밀까요? (사람들, 어쩌면 특히 이성 사이에서 인기를 건 지위 게임) 왜 게임에서 당신의 랭킹을 높이고 싶나요?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 간의 지위 게임) 왜 자신의 분야에서 더 잘하고 싶나요?




지위에 대한 욕망

우리는 모두 ‘위대해지고 싶은 욕망’ 혹은 ‘특별(소중)해지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에 따라 두 욕망 중 어느 한쪽에 더 가까울 겁니다. 림빅 시스템의 세 항목 중 ‘지배’ 성향이 강한지 ‘균형’ 성향이 강한지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고로 나머지 하나의 성향은 ‘자극’ 성향입니다.)


현실의 지위 게임에서 자신의 욕망이 성취 가능성이 없어 보이거나, 욕망이 좌절되면 우리의 뇌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울과 무기력을 보이게 됩니다. (지위는 세로토닌과 밀접하게 관련됩니다.) 또는 자신이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가상의 세계(게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 빠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위 게임은 어떻게 인간 행동을 설명하는 데 핵심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요?




타 종과 같은 종 간의 생존 경쟁

모든 종의 모든 개체가 번식과 번영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구의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합니다. 모든 종의 모든 개체가 번성한다면, 지구 자원은 진작에 고갈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모두가 서로서로 경쟁해야 합니다.

타 종간의 경쟁에서 유리하려면 종의 생물학적 특성이 자연에 적합하여 타 종에 비해 유리한 입지 또는 고유한 입지(생물학적 지위)를 점해야 합니다. 그 심판은 자연입니다. 각 종이 나름대로 열심히 진화해 가며 다양한 생존 전략을 시도합니다. 인간은 종 간의 경쟁에서 제법 성공한 듯 보입니다.


같은 종 간의 경쟁에서 유리하려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어야 합니다. 사피엔스 종은 자신의 능력이나 쓸모를 개발하여 사회 경제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의 규칙 내에서 지위 게임에 참여하고, 그 심판은 인간이 자체적으로 고안해 낸 자본주의 시장 원리입니다. 유전자는 자신을 실은 기계에게 우회적으로 명령합니다. “나를 복제해라!” 우리는 생존과 번식의 기회를 잡기 위해, 남들보다 더 잘하고 위대해지려는 끝없는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인류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지위 게임에는 세 영역이 있다고 합니다. 지배 게임, 성공 게임, 도덕 게임입니다. 초창기 수렵 채집 시절에는 지배 게임이 우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물리적인 폭력이 주도했던 지배 게임보다는 평판 게임(도덕 + 성공 게임)이 부상했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똑똑 흐르는 자원 속에서, 평판 게임을 통해 높은 지위(또는 안정적 입지)를 차지해서 자원 통제력을 얻어야 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사랑받는다

사실 지위를 얻는 것은 물질적 조건을 보장받는 것(경제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정신적으로도 후하게 보상받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주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습니다. 세상 귀중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학교에 입학하여 시험을 치르게 되면 무조건적인 사랑은 끝이 납니다. 시험 점수가 사랑의 조건이 됩니다(적어도 말을 잘 듣는 것이 사랑받는 조건이 됩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쟁취해야 합니다. 점차 무조건적인 사랑은 희박해집니다. 세상의 눈으로 바라봤을 때, 가치나 중요성을 띤 사람이 사회적으로 사랑받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 경제적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합니다. 사랑받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남들만큼만 살고 싶어도 경쟁은 치열해진다

“나는 별로 남들보다 더 잘나거나 위대해질 생각이 없다”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만큼은 살고 싶습니다. 다만, 집단에서 안정적인 입지를 다지는 행위는 집단 내 하위권 친구들을 제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남들만큼 살고 싶은 사람들만 있어도 제법 치열한 게임이 펼쳐집니다. 여기서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상대적으로 인식합니다. 모든 사람이 2만 원을 받는 것보다, 내가 싫어하는 친구가 1만 원 받을 때, 내가 2만 원을 받는 게 더 기쁩니다.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나’의 위치를 파악하고 집단 내에서 상대적 이득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생존 전략입니다.


이 상대성을 조금 더 확장해보겠습니다. 과거 150명 구성원의 부족 사회에서 3등 대장장이라면, 상위 2%로서 매우 훌륭한 대장장이의 지위를 갖고 있을 것입니다. 나보다 대장간 일을 잘하는 친구가 2명밖에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껏 이렇게 온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뇌는 150명 정도의 적은 숫자 내에서 자신의 지위를 가늠하기는 능숙하지만, 지구 80억 인구 중에서, 혹은 5천만 인구 중에서 자신의 지위를 가늠하려니 과부하와 오류가 발생합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100명만 되어 보여도 (뇌가 자신의 지위를 150명 기준으로 산정했을 때) 자신을 상위 66%로 인식하는 겁니다.


하지만 인터넷에는 잘나고, 잘난 사람들이 유독 많습니다. 내 피드에 그런 사람들이 수백 명 넘게 뜨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초라함을 느낍니다. 통계가 아닌, ‘일화의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인구수 대비 강력 범죄가 그렇게 많이는 일어나지 않아도, 강력 범죄 일화가 너무나 강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강력 범죄가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몇 명의 남달라보이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의 지위가 한없이 낮아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상위 10%의 자산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평범한 중산층으로 인식하는 것에 이런 이유가 있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이것저것 다 잘하는 소위 육각형 인간이 선망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저 친구와는 돈이라는 지위 게임에서 지고, 저 친구에게는 피지컬의 지위 게임에서 지고, 또 이번에는 예술적 재능의 지위 게임에서 지고… 이런 식으로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다보면, 모든 분야의 지위 게임에서 진 듯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지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책정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낮게 인식하는 사람은 세로토닌이 덜 분비되고, 스트레스와 불안이 많아지며 우울증 발병 위험이 커집니다.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지위 게임의 부산물에 너무 깊이 빠지게 됩니다.


실제로 지위 게임에는 위대해지고 싶은 사람들도 꽤 많습니다. 인류의 꼭대기 위에 서고 싶은 정치인도 있고, 화성에 가고 싶은 일론 머스크도 있습니다. 그래서 피 튀기는 게임이 펼쳐집니다. 게임은 점점 더 치열해집니다. 인류의 문화 발전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무한한 것이 가능해 보이고, 미래는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되어갑니다. 이 와중에 우리가 확실히 챙길 수 있는 것은 건강입니다. 건강의 프리미엄, 저속 노화의 프리미엄, 수명의 프리미엄(심지어는 영생)과 연루된 자본주의와 AI는 통제 불가능한 폭주 기관차입니다.


우리는 디지털과 미디어 환경 때문에 옆 세계(혹은 더 높은 세계)를 보기 싫어도 보게 됩니다. 낮은 지위 인식, 지위 불안 때문에 우리는 자기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합니다. 이제 자신의 세계에서만 속해 살아가기 힘들어 보입니다. 세계화와 함께 더욱 커진 지위 게임의 장. 이제 모두가 모두와 경쟁을 하게 됐습니다.


지위 게임 이론을 대략 이해하셨나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별 탈이 없다면 자본주의 게임은 계속 진행될 겁니다. 점점 사회 경제적 지위 게임에서 소수만이 승리하고, 세간에 소위 “패배자”로 여겨지는 사람은 늘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은 앞으로 막강한 AI 기술을 보유한 공룡 IT 기업이 자본을 대부분 흡수하여, 경제 지위 게임 결과 99.9%의 패배자가 나오게 될 것으로 전망합니다. 앞으로는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지위를 얻기 어렵고, 과거 신분제처럼 지위가 굳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지위 게임의 함정

삶의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된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경쟁을 갈망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은 본능적인 지위 욕구 때문입니다. 외모나 대학 간판, 배우자, 직업적 성취, 스포츠 카, 팔로워 수, 자식의 성공 등 새로운 지위의 상징이 끊임없이 출현하며 게임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심지어 모든 분야의 지위 게임에서 승리를 추구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경쟁’이라는 지위 게임의 허울 속에 무작정 뛰어든다는 점입니다. 자신(혹은 지위)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게임은 더욱 격렬해집니다. (SNS만 잠깐 봐도 자신보다 잘나 보이는 사람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은근히 우리 마음에 미묘한 동요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위한 경쟁일까요? 이상하게도 죽음 그 자체보다도 아무 지위도 없이 늙어가는 것, 사회적 도태로 여겨지는 사회적 죽음이 더 수치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취업 시장이라는 지위 게임에서 밀려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차라리 죽음이 달콤해 보일 정도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게임은 게임일 뿐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거대한 지위 게임 속에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일단, 세상이 지위 게임의 장이라는 것을 알고 참여하는 것과 모르고 참여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않으면, 게임의 본질과 규칙에서 멀어져 불필요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특히 “자신을 플레이어가 아니라 고귀한 도덕적 영웅이라고 믿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지위를 (적어도 머릿속에서) 손쉽게 높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남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면 됩니다. 이는 ‘타인에 대한 도덕적 비난’과 연결될 때 과격해지며, 남들을 비참한 처지로 떨어뜨려 자신을 높이려는 지배 행동과 결합되기도 합니다.” 연예인들의 나락 소식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지위 게임에 민감합니다. 내가 올라가지 못하면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것 또한 방법이라고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도덕적 비난을 통해 순간적인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결국 이는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입니다. 도덕의 영역을 불필요하게 확장하여 세상을 흑과 백, 선과 악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를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와 동떨어진 꿈을 꾸는 사람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우습게 보며 비난하는 행동은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지위를 바탕으로 남에게 모멸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일상의 순간에서 상대방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지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윌 스토에 따르면, 지위는 고갈되는 자원이 아니며, 큰 비용 없이도 남들에게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일상의 순간에서 타인의 지위를 높다고 느끼게끔 해주는 겁니다. 가령 어머니의 밥상에 감사하는 식으로요. (‘최고의 어머니 게임’) 그럼 상대방도 우리의 영향력을 인정해 줄 것입니다.

“지위는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합니다. 지위 게임은 내가 ‘우리 사이’에서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기 위해 참여하는 공모의 장입니다.” 타인이 없다면 지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위는 상대방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부여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게임에 자신의 모든 정체성을 몰아넣지 않고, 다양한 ‘나’로 여러 게임에 참여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 더 행복하고 안정된 정서를 가진다고 합니다. 특정 사회 경제적 지위 게임에 모든 것을 걸기보다, 취미나 관심사 등 ‘국소적인 지위 게임’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취미의 지위 게임이 사회경제적 지위 게임보다 개인의 행복과 안녕감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도 있습니다. 하나의 게임에서 좌절하더라도 다른 게임에서 얻는 만족감으로 회복 탄력성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게임에 똑같이 중요도를 배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임에 더 몰입하되, 다른 게임의 존재도 잊지 않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그 과정에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즐기는 지위 게임의 영역도 존중해줘야 합니다. (저 역시 사회 경제적 지위 게임을 존중합니다. 그런데, 그 게임의 중요도와 영향력이 상당히 큰 점이 우려됩니다. 로버트 새폴스키는 “몸과 마음을 좀먹고 상처낸다는 측면에서, 다른 동물들이 지위 차이를 놓고 제아무리 고약하게 굴어봐야, 인간이 발명해낸 가난의 영향에는 발끝에도 미친다”고 합니다.)

“인생은 결승선 없는 게임이니 과정을 즐겨야 합니다. 세상을 승리와 패배로 나누지 않는 겁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최후의 영광이나 승리가 아니라, 단순하고 소박한 과정에서 얻는 즐거움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며 즐거움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 그 누구도 지위 게임에서 영원히 승리하지 못합니다. 아니, 승리해서도 안 됩니다. 인생의 의미는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사실은 우리가 하는 게임들의 총합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지위 게임’이라는 꿈에서 깨어났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얻고 다른 차원의 새로운 게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지위와 함께 고려해야 할 도파민

우리는 지위 게임에 하루 24시간을 모두 소진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혼자서 또는 친구들과 여가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의 여가 시간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림빅 시스템의 ‘자극’ 성향입니다.

사람은 따분한 것을 좀처럼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 뇌가 “가만히 있지만 말고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뭐라도 좀 찾아봐” 또는 “(더 나은 삶을 위해) 좋은 아이디어 없어?”라고 말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심심함에 몸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하고, 부지런히 주변을 탐색하며 열매를 발견하고, 미지의 세계에 진출해서 자신의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주변 세상에서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탐색하고 쟁취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부추긴 것은 앞서 살핀 ‘도파민’입니다.

인류는 점차 여러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기 시작했으며, 끝없이 새로운 것을 발명했습니다. 인류사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은 따분함을 참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과 밈의 번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동시에 남들보다 더 위대해지려는 마음도 함께 작용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은 자연과 사람에서 자극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초정상 자극(자연적인 자극을 월등히 넘어서는 과장된, 인위적 자극)이 판을 칩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새로운 자극을 찾아나섭니다.




사회적 지위와 양질의 자극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지위가 낮은 사람에 비해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적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디지털 세계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 건전한 양질의 자극(고급 문화 콘텐츠와 음식, 사회적 상호작용)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 또는 지위 게임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비용이 적게 드는 패스트푸드나 디지털 속에서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누릴 수 있는 음식이나 콘텐츠에 더 많이 접근하고 머물게 됩니다. (물론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패스트푸드를 즐겨먹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무조건 좋은 것일까요? 유명인의 마약 투약이 회자됩니다. 높은 지위에 몸담고 있던 사람도 우울해질 수 있습니다. 도파민의 욕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더 높은 지위,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은 대부분 좌절됩니다. 이미 높은 곳에 있을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지위 역시 자극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목표한 지위를 성취하면 호르몬을 통해 보상받지만, 다시 호르몬의 분비가 줄어들어 다시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다시 한번 그 짜릿함을 경험하고 싶은 것입니다. (높은 지위를 어릴 적에 맛본 아이돌이나 운동선수가 커리어 하이를 지나며 우울에 취약해질 수 있는 것도 비슷한 까닭입니다.) 마약에 손을 댄 유명인은 이미 웬만한 성취와 자극을 다 경험해 봤을 것입니다. 그의 도파민 레벨 수준에서 자극을 받기 위해서는 마약 이외의 방법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근심걱정 없이 나로 머물기가 왜 이리 힘든가

우리는 보통 자신의 삶이 드라마 같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삶이 펼쳐지기를 바라고 좋은 쪽으로 극적인 일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어렴풋한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척박한 현실은 따분하고 좌절스럽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반대극인 드라마나 만화의 서사에서 자극을 받고,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사랑하고 도전하는 과정을 보며 열정과 위안을 느끼고 푹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나 자신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그곳엔 내가 있고, 결국 언제라도 자신과 함께해야 합니다. 하지만 콘텐츠 시청 등 여타 활동에 몰입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 근심 걱정 없이 머물기가 왜 이렇게 버거운지요.

한병철 선생은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자신에게 채찍질을 휘두르고 있으며, <정보의 지배>에서 우리가 쉴 때조차 정보 사료를 먹는 가축이라 꼬집습니다. <서사의 위기>에서 우리는 정보를 아주 잘 갖췄지만, 이야기의 결여 때문에 방향을 상실했다 했고, <리추얼의 종말>에서 오늘날 세계는 안정적인 시간 축을 확립하는 상징적인 것이 몹시 결핍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의 사유를 함께 따라가보고자 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감각을 죽이고, 자신의 기억을 죽였다. 그는 자신의 자아에서 빠져나와 수천이나 되는 낯선 형상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짐승이 되었고, 썩은 짐승의 시체가 되었고, 돌이 되었고, 나무가 되었고, 물이 되었다. 그런데도 매번 깨어나면서 다시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 해가 비추고 달이 비추었다. 그는 다시금 자기 자신이 되었다. 그는 윤회 속에서 방황하며 갈증을 느꼈고, 갈증을 극복하고 나면 또다시 새로운 갈증을 느꼈다.


싯다르타는 수천 번 자아로부터 도망쳐 무에 머물렀다. 하지만 짐승 속에, 돌 속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결국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자아였고, 싯다르타였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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