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불행은 방안에 홀로
조용히 앉아 있지 못하는 데서 시작된다.
- 블레이즈 파스칼 -
(이번 장의 내용과 표현은 고쿠분 고이치로의 책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참고로 합니다. “ ”는 직접 인용입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지루함을 단순히 할 일 없는 한가한 상태가 아니라, ‘뭔가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갈증’, 즉 ‘살아있다는 감각의 결여’에서 오는 고통과 연결 짓습니다. 인간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기분 전환’을 꾀합니다. 고쿠분은 이러한 지루함을 깊이와 양상에 따라 세 가지 형식으로 분류하며 현대인이 지루함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제안합니다.
제1형식 지루함: 외부 대상에 의한 지루함
1형식의 지루함은, 지루함의 원인이 명확하게 외부에 있을 때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버스 배차가 긴 구간이라서, 버스를 기다리는 특정 상황(이동하는 상황)에서 특정 대상(버스) 때문에 나타나는 지루함입니다. “대상(버스)과 주체(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나) 사이에 시간 차가 존재하여 지루함이 생긴다.” 어쩌면 잠이 오지 않는 상황도, 1형식의 지루함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잠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시간이 비어버리니까요.
“시간은 느릿하게 느껴지고, 우리는 조바심을 내며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기 위해 시계를 보거나 기분 전환에 매달린다. 분명, 우리 주변에는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주변 사물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으며, 우리가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고쿠분은 이것을 가리켜 ‘공허 방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소일거리나 기분 전환 거리를 찾아 나섭니다. “첫 번째 형식의 지루함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크게 잃고 있으며, 시간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심하면 강박에 시달려 일이나 자기 개발, 기분 전환 요소에 중독되기도 합니다.
2형식 지루함: ‘무엇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루함
2형식의 지루함은 좀 더 깊은 단계의 지루함입니다. 딱히 할 게 없어서 모임에 참석했는데도 “아, 왜 이렇게 재미없지?” 하고 주위 모든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뭔가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느끼는 지루함이죠. 내면에서 비롯되는 포괄적 지루함이며, 단순한 ‘기분 전환’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루함을 없애주어야 할 활동을 하면서도 되레 지루해지는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제3형식 지루함: 아무튼 그냥 지루함
상황과 무관하게 불쑥 찾아오는 가장 악랄한 형태의 지루함입니다. ‘아무튼 그냥 지루하다(es ist einem langeilig)’는 기분은 어떠한 ‘기분 전환’조차 허용하지 않고 우리를 심연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광활한 공간에 홀로 방치된 것처럼 느껴지는 극단적인 ‘공허 방치’ 상태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기분 전환 요소를 간절히 바라지만, “지루함의 설교로부터 도망칠 길이 없고, 자신을 마주 보는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는 이 강제된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문턱에 서게 되며, “결단함으로써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지루해할 수 있기에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고쿠분은 이 3형식의 결단이 다시 1형식으로 이어지면서, 결단된 내용(일이나 자기계발 같은 자기착취)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만의 독특한 지각 체계를 가지고 세상을 인식합니다. 또, 나름의 행동 양식을 통해 살아가지요. 각 생명체는 각자의 ‘둘레세계(윅스퀼이 주장한 개념)’를 가지고 있으며, 각 생명체는 각자의 둘레세계에서 의미 있는 신호를 포착합니다. 이 신호는 ‘행위 유발성’과 이어집니다. 행위 유발성이란 특정 환경이 유기체에게 제공하는 ‘행동 가능성’ 또는 ‘기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망치를 든 목수가 못을 발견하면, 목수는 망치로 못을 내리칠 것입니다. 못은 목수에게 망치질을 유발하는 행위 유발성입니다. 각 동물의 감각 및 운동 체계는 자신의 생존과 종 특유의 행동에 필요한 특정 행위 유발성만을 지각하도록 진화했으며, 이것이 그들의 실재, 즉 온톨로지를 규정합니다.
진드기는 오로지 ‘뷰티르산 냄새’, ‘섭씨 37도 온도’, ‘체모가 적은 피부 조직’이라는 세 가지 신호만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진드기는 ‘흡혈’이라는 행위를 유발하는 세 가지 신호로 구성된 행위 유발성에 압도되어 살아갑니다. 진드기의 온톨로지는 극도로 단순합니다. (그들의 세계에는 포유류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배를 채울 수 있는 옹달샘이 있을 뿐입니다.)
꿀벌의 둘레 세계는 진드기보다는 복잡하지만, 여전히 인간보다는 단순합니다. 꿀벌에게 꽃은 인간이 인식하는 아름다운 식물의 한 종류가 아니라, ‘꿀 채취’라는 행위를 유발하는 특정 시각 및 후각 신호들의 복합체입니다. 꿀벌은 꿀에 ‘얼빠져서’ 꿀 채집을 유도하는 행위 유발성에 반응합니다.
하이데거의 관점에서도 동물은 특정한 신호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행위 유발성을 경험할 뿐, 그 본질을 ‘꿀’ 그 자체로 개념화하거나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일반 동물종은 자신의 둘레세계 내에서 주어진 신호와 행위 유발성에 압도되어 순수하게 그 세계에 몰입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릅니다. 우리 역시 꿀을 꿀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한 사물에 대해서 보다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하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주 물리학자와 일반인이 태양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의 대상에 대해 무한히 확장된 ‘둘레세계’를 가질 수 있다.” 인간이 환경으로부터 지각할 수 있는 행위 유발성의 범위가 훨씬 넓고 유연하며, 추상적인 행위 유발성(단어나 상징)까지도 인지하고 생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인간이 동물보다 더 지루함을 느끼는 근본적인 이유를 ‘환경 세계 이동 능력’에서 찾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의 ‘둘레 세계’에서 다른 ‘둘레세계’로 이동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의 안정된 둘레 세계에서 무언가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를 지속하지 않고 여러 둘레 세계를 오가며 자신의 온톨로지를 확장해 갑니다.
우리는 안정된 환경에 놓이더라도 이내 지루함을 느끼고 다른 행위 유발성을 찾아 나섭니다. 인간의 넓은 ‘행위 유발성 지각 스펙트럼’은 우리가 하나의 행위 유발성에 오래 몰입하게 하지 못하고, 동시에 지루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고쿠분은 이어서 들뢰즈의 이야기를 꺼내며, 인간의 둘레 세계간 이동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삶에 무언가 ‘불법 침입’해서 일상이 붕괴될 때”입니다. “우리는 일상의 붕괴에 대한 대응을 강요받아 사고하기 시작한다. 생각할 때 사람은 생각의 대상에 의해 압도당한다. 불법 침입해 온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둘레세계의 붕괴를 겪고 재창조 과정에 참여하면서 일상적으로 동물되기를 경험한다.” (고쿠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의 일종으로 꿀벌의 예시처럼 ‘대상에 압도되는 것’, 즉 ‘동물처럼 되기’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무언가에 불법 침입당해도 우리는 금세 적응하고 익숙해집니다. 이 경우 “더 강하게 압도당할 대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고쿠분은 즐기고 향유하는 것은 생각(압도되는 경험)으로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고쿠분은 우리가 피하려는 ‘지루함’, 특히 ‘기분 전환을 하고 있으면서도 지루한’ 제2형식의 지루함이야말로 우리가 대체로 살아가고 있는 지루함이라고 말합니다. 2형식의 지루함이 만연할 때, 우리는 미디어 광고에 흔들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이 순간을 낭비하면서 만족할 수 있었지만, 어느새 또 다른 것을 쫓아가는 소비자가 되어버립니다. 원래라면 즐길 수 있는 상황에서, ‘이것보다 더 즐거운 뭔가가 있을 거야’하는 관념에 사로잡히면서 지금 눈앞의 사물과 세계를 향유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분 전환을 하는 와중에 느끼는 지루함 속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흥미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은 채, 우리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지루함을 느낍니다. 이런 한가함이야말로 우리가 세계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지루함을 느끼면서도 사물을 향유하고 즐길 수 있게 됩니다.
고쿠분에 따르면, 영화를 계속 보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영화의 미학이나 메시지를 살펴보고, 어떻게 이렇게 멋진 영화가 나온 것인지, 감독은 누구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술의 아름다움에 압도되면 그 작품의 배경을 공부하거나 같은 예술가의 다른 작품을 찾아갑니다. 이런 교양적인 것들뿐만 아니라, 어떤 식재료로 어떻게 요리해야 맛있을지 음식의 맛을 탐구하거나, 운동 같은 신체적인 몰입 행위도 연습과 훈련을 통해 더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즐기고, 그 즐거움에 압도되어 그 즐거움 경험과 관련된 것을 (어떻게 해야 더 잘 즐기고 압도될 수 있을까를) 줄줄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별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안정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어하면서도, 그런 세계에서 지루함을 느낍니다. 들뢰즈는 주말마다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방문하며 ‘압도당할 순간’, 즉 ‘동물 되기의 순간’을 기다립니다. 동물들은 어디서 먹잇감을 잡을 수 있을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들뢰즈 역시 압도되는 경험을 위한 그만의 사냥터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버리고 낯선 것에 압도될 때 비로소 지루함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유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순간이 바로 ‘동물 되기’에 성공하는 순간입니다.
앞서 살폈던 한병철 선생의 관점을 빌리자면, 현대인은 타인이나 타자, 사물이나 자연에 진정으로 경외하고 ‘압도되는’ 경험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는 현대 사회, 특히 신자유주의 체제와 디지털 사회가 ‘낯선 타자’를 제거하고 ‘같은 것’만 추구하는 경향을 지적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낯섦과 충격을 주는 타자나 대상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친숙하고 안전하며 대체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그것’이라는 형태로 변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두려움에, 우리를 압도하도록 하는 대상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제한을 풀어놓음으로써, 끊임없이 재미와 관념을 소비하라는 현대 사회의 강요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지루함’을 즐기며 ‘압도되는 순간’을 기다리고 기다리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현대 사회는 지루함을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을 제공합니다. 맛집 탐방, 재밌는 영상, 꼭 가봐야 할 유럽 여행지 등등. 관념적인 소비 게임이 지루함을 동력 삼아 끊임없이 부추겨집니다. 고쿠분은 어느 선에서 멈추게 되고 만족감을 주는 ‘낭비’와 달리, 소비는 끝없이 이어지는 특성을 가진다고 지적하며, 소비 사회는 ‘낭비할 자유’를 빼앗아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소비 사회에서는 모든 활동이 소비의 논리로 뒤덮입니다. 노동마저 바쁨과 유능함을 소비하는 행위이며, (물론 노동은 가치를 생산하기 때문에) 갤브이스는 노동을 하며 삶의 보람을 느끼는 노동자 계급을 적극 환영합니다. 여가는 비생산적인 활동을 소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지루함과 기분 전환이 뒤얽힌 삶, 지루함도 있지만 나름 즐거움도 있는 삶, 그것이 인간다운 삶이다. 하지만 세계에는 그러한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 전쟁, 기근, 빈곤, 재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다운 삶을 허락하지 않는 사건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 시대와 부끄러운 타협을 계속하고 있다. 이 치욕의 감정은 철학의 가장 강력한 동기 중 하나다.”)
지루함과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은 어디까지나 자신과 관련된 물음이다. 그러나 지루함과 마주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인간은 아마도 자신이 아닌 타인과 관련된 일을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의 다음 과제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즉, 어떻게 하면 모두가 한가해질 수 있는지, 모두에게 한가함을 허용하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을지 하는 물음이다.
마르크스는 ‘자유의 왕국’의 근본적 조건이 노동일의 단축이라고 했다. 누구나 한가로운 삶을 향유하는 왕국, 한가함의 왕국이야말로 자유의 왕국이다. 누구나 이 왕국의 근본적 조건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사물을 받아들이고 즐기는 것이 사치라면 한가함의 왕국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은 사치 속에서부터 시작된다.”
고쿠분이 보기에는 1형식(= 3형식)의 지루함이 우세한 사회는 한가함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고쿠분은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가장 인간다운 2형식의 지루함이 우세한 사회가 도래하기를 기대합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게으름을 하나의 ‘악’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일하는 시간 외의 시간에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가 주입하는 행위 강박이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자본은 거의 모든 인간과 그의 행위를 종속시킵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그의 책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이러한 시대에 통렬한 비판을 합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90년도 더 전에 기술 발전이 노동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음을 지적하며, 노동은 하루에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하지만 노동 시간을 줄여도 누군가 그 시간에 해야 할 일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파킨스의 법칙과 이어집니다(‘일은 그것을 완료하는 데 주어진 시간을 모두 채우도록 늘어난다.’) 4시간짜리 일이 2시간 만에 끝나도, 남은 2시간을 채우려고 잡다한 일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수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다고 느끼는, 또 스스로도 ‘이 일이 없어도 사회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가짜 노동(Bullshit Jobs)’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일 중 실제로는 사회에 아무런 긍정적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거나 존재 이유가 모호한 노동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가짜 노동 속에서도 바쁘게 움직이며 ‘무언가 하고 있다’, ‘하지만 뭔가 더 해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지쳐갑니다.
다시 러셀로 돌아오면, 그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하루 4시간씩만 일하여, 노동이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골고루 분배되고, 여유 또한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는 사회입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사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금 사회는 러셀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는 노동이 과도하게 몰리고,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의도치 않은 ‘잉여로운’ 시간이 주어지는 극심한 불균형 상태입니다.
앞서 언급했던 저자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일로 가득 찬 삶’에서 벗어나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가함’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만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누구에게나 그 한가함과 자유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우리 인간은 결코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AI가 없애는 것이 직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고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패러다임이기를 희망해봅니다.
* 고쿠분이 보기에 1형식과 3형식은 결이 맞닿아 있습니다. 3형식, 무한한 자유의 순간에서 결단함으로써, 그 결단의 내용에 의해 다시 1형식으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것이죠. 고쿠분은 결단하는 인간에게도 심대한 자기 상실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한병철의 책 <피로 사회>와도 연결됩니다. 자유 속에서 이루어지는 자기-착취를 경계해야 합니다.
짜증나고, 별로 까다롭지 않고, 지루하고 임금이 형편없는 일자리를 보존하겠시답고 시간 절약 장치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 모두의 시간을 존중하면서 절약된 노동 시간의 이득을 공유하는 소득 분배 체제가 있는 사회라면 확실히 그런 기술이 환영받을 것이다. 우리는 무의미한 일자리의 필요성을 제거하는 모든 전망에 대해 기뻐해야 할 것이다. 일자리 최소화라는 목적이 일자리 최대화를 대체하려는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 가이 스탠딩, <시간 불평등>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자리는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수명은 전례없이 연장되고 있다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사회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 사이의 길고 긴 연옥 상태다.
-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다만, 제가 일과 직업 그 자체의 의미와 그 생명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저마다의 의미가 있을 터입니다. 저 역시 알랭드 보통의 책 <일의 기쁨과 슬픔>에 나오는 멋진 구절에 공감합니다.
우리의 가없는 불안을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성취가 가능한 몇 가지 목표로 집중시켜줄 것이다. 우리에게 뭔가를 정복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품위 있는 피로를 안겨줄 것이다. 식탁에 먹을 것을 올려놓아줄 것이다. 더 큰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게 해줄 것이다.
단순히 돈을 버는 경제적 수단으로서의 일에서 벗어난 일. 스트레스와 고통, 슬픔뿐만 아니라,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 안도감과 기분 좋은 피로감을 안겨주는 일. 어떠한 형태든 생존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일. 그 안에서 우리는 안도감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알랭 드 보통, <일의 기쁨과 슬픔>
한편, 애나 렘키는 현재 고용 상태에 따라 주중에 개인별로 엄청난 여가 시간의 차이가 생긴다고 하며, “도파민 소비는 노동에 쓰지 않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에 머물지 않으며, 사람들이 노동 자체를 포기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 직업 시장의 대규모 재편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새로운 균형을 잡게 될까요? 감히 예상이 되지 않습니다.
더는 무용한 교육을 언제까지고 계속하는 우리. (공룡 잡는 법을 배우고 보니, 공룡은 이미 멸종한지 오래. 그런데도 계속되는 사냥법의 전수) 서로 깎아내리고, 스트레스를 줘서 불임을 유도하는 것은 침팬지도 터득한 전략. 자꾸 구분 짓고 소외하는 세상. 이상한 법칙을 따르는 세상. 간단히 한 줄로 요약하자면, 당신이 견딜 수 없던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