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동해야만 하는 기계, 소통 강박의 노이로제
정보 사료 처먹는 가축, 전부 너의 또 다른 이름
- <바라보자, 머무르자>, 에고이스트 -
이번 장의 대부분은 한병철의 책 <관조하는 삶>의 내용과 표현을 어체를 수정해서 옮겨왔습니다. ‘괄호( )’ 안의 내용과 일부 내용은 제가 추가하거나 수정한 내용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끊임없는 행위와 생산, 성과에 대한 강제 속에서 숨 가쁘게 살아간다. 인간은 행위하면서 질식한다. 반면 무위할 때, 그리고 성찰할 때 비로소 넉넉한 공간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나름의 논리를 가진 풍요로운 시간이 인간을 둘러싼다.”
“우리는 우리의 최고 능력들을 오로지 자본을 증식하고 재생산하는 데 사용한다. 그렇기에 자칫 인간 행위 전체가 (자신과 우리라는) 가축 사육으로 격하된다. 삶은 무위에서 비로소 찬란함을 획득한다. 능력으로서의 무위가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는 그저 작동해야하는 기계와 다를 바 없다.”
니체는 “무위 안에서 빛나는 자유로운 정신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행위하는 자들 때문에 우리 문명이 새로운 야만으로 전락했다. 행위 강제는 같음을 지속시킨다.” (분명, 정신 없는 내달림 속에서는 방향을 틀지 못합니다.) “생존을 위한 염려가 끝나는 순간에 참된 삶이 시작된다.” (또, 지위 게임에서 자유워질 때)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증명하거나, 자신을 기꺼이 내보입니다. SNS에서 자신을 재생산합니다. “정말로 무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려놓고 ‘Nobody’가 된다. 이름도 의도도 없이 그저 일어나는 일에 자기를 내맡긴다. 무위할 때는 결연한 자기가 형성되지 않는다.”
‘일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봄이 오고 풀이 저절로 자라네’
“위의 하이쿠에서 무위하는 사람은 문장의 주어가 아니다. 그는 주체로서의 속성과 행위를 봄, 그러니까 자연에게 양도한다. 요즘 와서는 활동이 인간의 실존을 남김없이 흡수한다. 우리는 무위를 느끼는 감각을 상실해간다. 행위를 해야 한다는 압박 앞에서 실존은 착취 가능한 것이 된다.” (무위할 때는 뚜렷한 자기가 형성되지 않기에 실존조차 개념에 불과한 아무래도 좋을 단어가 됩니다.)
“화가 폴 세잔이 말하기를, 무위는 인간 실존 그 이상이다. 이상적인 화가인 그는 모든 행위, 모든 의도를 내려놓고 모든 일이 저절로 일어나게 놔둔다. 화가가 없는 놈이 되는 순간, 그림이 이루어진다. 그는 완전히 풍경으로 들어간다. 풍경 안에서 자기를 잃는다. 무위의 찬란함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융합한다. 폴 세잔은 그의 그림 <목욕하는 사람들>에서 인간이 노동, 수고, 부담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는 날을 미리 보여준다.”
무위와 종교 체험
“오늘날 영혼은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영혼은 자기를 생산한다. 영혼의 과도 활동이야말로 종교적 경험의 상실을 초래하는 원인이다. 몰아는 종교적 경험을 위해 근본적으로 중요하다. 종교는 모든 행위를 거두고, 무한을 경탄하며 직관하기다.”
한병철 선생의 말을 빌리면, 우리 존재의 연속성을 파괴하는 것은 각자의 의도와 판단입니다. 우리(좌뇌 해석장치)는 쉼 없이 판단하고, 구별하고 경계를 긋습니다.
반대로 해석장치가 침묵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귀 기울이는 나는 전체 속으로, 경계 없음 속으로, 무한 속으로 침몰한다. 모든 종교에서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자신을 우주에 내어주라.” “우리는 오직 관조 속에서 영원을 체험할 수 있다.”
한병철 선생이 말하는 무위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는 의미보다는 가만히 바라보기, 가끔 성찰하기, 그리고 아무런 의도 없이 행하기, 그러면서도 자신을 앞에 내세우지 않고, 그저 풍경의 일부 되기입니다. 자신을 잃을 정도로 무엇에 즐겁게 몰입하는 행위도 일종의 무위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활동하긴 하지만 무언가를 위해 활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언가를-위하지-않음, 목적과 효용, 그리고 성과로부터의 자유가 무위의 핵심입니다. “‘위하여’로부터의 해방이 인간의 실존에 축제성과 찬란함을 부여”합니다.
급하게 행위하는 사람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파우스트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시간아 멈추어라, 그대는 너무나 아름답구나”. “이런 대사를 하는 사람은 행위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으로서의 존재 충만은 바라보기에서 이루어진다. 바라보기가 최고의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깨달음을 우리는 잊어버렸다.”
“우리는 심심함을 점점 더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경험하는 능력이 위축된다. 우리는 무위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예민하게 되살림으로써, 삶을 갱신한다. 그렇게 우리는 전에 발견하지 못한 것들 하나하나에게서 삶의 생동성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삶의 찬란함을 되돌려 받는다.” “무위는 무능도, 거부도, 한낱 활동의 부재도 아니라 독자적인 능력이다. 무위는 고유한 논리, 고유한 시간성, 고유한 찬란함, 고유한 마법까지 지녔다. 무위는 제거해야 할 약점이나 결함이 아니라 집약성이다.” “아이들은 무위하며 행복하게 길을 잃는다. 탐욕 없는 아이들은 손에 움켜쥐지 않으며, 그저 놀이한다.”
“창조적으로 행위하는 자는 행위하되, 어떤 성과를 위해 행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에게 창조하던 손을 주던 한가로움은 절멸했다. 창조하는 손은 행위하지 않는다. 그 손은 귀 기울인다. 인터넷은 우리에게서 귀 기울이는 능력을 앗아갔다. 기다림은 아무것도 기다리지 않을 때, 심지어 기다림의 종결마저도 기다리지 않을 때 시작된다.”
우리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이전에 이야기 된 적 없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행위에 무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혀 다른 무언가, 있었던 적 없는 무언가의 발생이 가능해진다.” 무위는 우리를 다시 행위로 소환합니다. 대신, 전에 없던 길이 열립니다. 무위는 “들어본 적 없는 실행으로 넘어가는 문턱”입니다.
봄의 백화, 가을의 달, 여름의 서늘한 바람, 겨울의 눈
정신에 쓸데없는 일이 매달려 있지 않다면
그게 바로 사람에게 좋은 때라네
- <무문관>, 선종 스님들의 화두집
“좋은 시간에 들어가려면 정신에서 쓸데없는 것을 비워내야 한다. 이러한 비움이 정신을 욕망에서 해방하고 시간에 깊이를 만들어낸다. 시간을 극도로 무상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다.” “욕망으로 인해 정신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방향성 없이 마구 내달린다. 정신이 자기 안에 편안히 머물러 있을 때, 좋은 시간이 찾아온다.” 우리는 저절로 찾아오는 좋은 시간을 내쳐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시간은 각기 고유의 향기를 지닌다. 오후가 지나간 것에 아쉬워 할 필요 없다. 오후의 향기 뒤에는 저녁의 좋은 냄새가 따라올 것이다. 그리고 밤은 또 그만의 고유한 향기를 발산한다. 젊음이 좋다지만 젊음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에 아쉬워 할 것 없다. 모든 시간은 저마다의 고유한 향기를 발하기 때문이다. 그 향기를 맡을 서두름 없는 정신만 있다면 말이다.”
누구라도 가끔은 삶의 의미와 자신의 존재에 허기를 느끼게 됩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야기와 함께 세우고, 이야기 속에서 특정한 배역을 맡기 원합니다. 문화권 별로 정해져 있는 성공 서사, 남부럽지 않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마음 역시 삶을 좋은 시간으로 채우는 데에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거창한 이야기, 남이 지어준 이야기는 없어도 좋습니다. 어쩌면 지금 여기서 잔잔하게 존재하다 보면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가 자연히 써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삶에 서사와 이야기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족쇄(서사 강제)가 되면, 본말전도입니다. 우리는 이야기 그 이상이니까요. (지금 여기에) 고유한 시간의 향기 맡기 명상(체험)도 해봐야겠습니다.
* “ ”는 한병철 (Byung-Chul Han), 『시간의 향기』, 김태환 역, 2013, 문학과지성사에 나오는 내용의 인용입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 따라 문명화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사회에서 노동은 괴로운 행위가 아니라, 개개인이 저마다 실존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일종의 표현 활동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마르크스는 노동을 본래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 이상의 다양한 의의를 지닌, 인간의 본질적인 행위로 여겼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활동(Thätigkeit)’은 자본이 몰아붙여서 강제적으로 행하는 ‘노동(Arbeit)’이 아니라, 활동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행위를 가리킨다.
- 야마구치 슈, <비즈니스의 미래
기존의 서사와 이야기는 주인공이 목표를 갖고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문제 인식 → 행동 → 성장 → 해피엔딩) 그러나 최근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헤어질 결심> 등에서는 “적극성 대신 수동성과 침묵을 택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주인공들이 주목받습니다.”
자기계발, 결혼, 진로 등 끊임없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현대인의 삶은 ‘문제 해결형’ 능동적 서사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심지어 “선택하지 않으면 실패로 간주되고, 선택한다고 해도 불안을 느낍니다.”) 저성장 시대, 적극 성장을 요구하는 기존의 서사 구조는 이제 ‘따라갈 수 없는 이상’처럼 느껴집니다. “수동적 캐릭터는 적극적인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며, 해결 불가능한 세계에 ‘머무는 법’을 말합니다. 적극적인 서사는 피로를, 수동적인 서사는 위로를 줍니다.”
불확실성이 커지는 동시에, 모든 선택의 책임이 능력 및 노력 부족이라는 말과 함께 개인에게 전가되며, ‘무력감’이라는 정서를 낳습니다. 하지만 “무력감은 오직 개인의 결함이 아닌 사회 구조와 거시적 위기 속에서 발생한 정서일 수도 있습니다.”
철학의 문제는 잘못 제기된 문제이므로
해결이 아닌 해소를 필요로 한다.
- 비트겐슈타인 -
* 이 꼭지의 내용은 F862의 카드 뉴스, “주인공들이 변하고 있다. 수동적인 캐릭터는 왜 이제야 발견되었는가”의 내용을 옮기고 재구성했습니다.
“비즈니스란 항상 ‘문제 발견’과 ‘문제 해소’의 과정으로 이루어지므로, 문제가 없어지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만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아이디어로 ‘인위적으로 문제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야마구치 슈, <비즈니스의 미래>).”
문득, 바틀비의 한 마디가 떠오릅니다. “I would prefer not to(저는 안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 마지막에 나오는 변호사의 탄식은 언제나 제 마음을 울립니다. “아, 바틀비여! 아, 인류여!”
서두르는 사람도
재촉하는 사람도
행위 강박도
지위 게임도
자랑도 허세도
흥분된 뉴스도
시샘도 폭력도
닿지 않는, 통하지 않는
순수한 세계가 여기 있었다
우리는 그저 있는 그대로 있었다
<자작시, 사우나에서 中>
그저 바라보자, 그저 머무르자.
나를 내려놓고 풍경의 일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