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없는 자들의 밤

희곡, 인질을 살리기 위해 얼마까지 돈을 낼 수 있는가.

by 밈바이러스

[등장인물]

경매인: 정체불명의 인물. 화면 너머 음성으로만 존재한다.

오진욱 (대통령): "모든 생명은 평등하다"는 슬로건으로 집권한 젊은 이상주의자.

강준 (비서실장): 국가의 효율성과 지지율을 최우선으로 하는 냉혈한 현실주의자.



[제1장: 인질극]

(무대 위, 사람 하나가 족히 들어갈 법한 크기의 검은 상자 네 개.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중앙 전광판에는 '구출 비용: 1,000억'이라는 글자가 붉게 빛난다.)

대통령: (전화기에 대고) 범인, 듣고 있나? 원하는 게 뭐야. 돈인가, 아니면 정치적 요구인가?

경매인: 대통령님, 저는 경매를 하러 온 겁니다. 당신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고귀한 '생명'이라는 상품 말이죠. 자, 여기 네 명의 인질이 있습니다. 1,000억만 내면 전원 살려주죠. 단, 그들이 누구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지불하시겠습니까?

비서실장: (대통령의 어깨를 잡으며) 대통령님, 안 됩니다. 1,000억은 국민의 혈세입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쏟아부었다간 내일 당장 탄핵입니다. 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국민들에게 증명해야 합니다.

경매인: (비웃으며) '가치'라... 결국 누구는 살릴 만하고, 누구는 죽여도 된다는 선을 긋겠다는 뜻이군요. 좋습니다. 정보 하나당 10억의 위약금이 발생합니다. 이번엔 국민들에게 묻죠. 친애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인질들의 정보를 사겠습니까, 아니면 블라인드로 묻고 따지지도 않고 살리겠습니까?

(전광판 투표 결과: [정보 공개: 92% / 블라인드 구출: 8%])

경매인: 축하합니다. 당신들은 방금 '평등'을 포기하고 '변별'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가격표를 붙여보죠.


[제2장: 소숫점의 도살장]

(무대 전면 대형 전광판. 전광판에 인질들의 정보가 하나씩 공개된다.)

1번 방: '무연고 빈곤 노인'이라는 글자가 뜬다.

2번 방: '월드 클래스 축구 선수'

3번 방: 20억짜리 약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특이 난치병 환자.

4번 방 : '쉬었음 청년'. 2년 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는 20대 남성.


(네 개의 방 위에 실시간 투표 수치가 소숫점 둘째 자리까지 표기되며 요동친다. 군중의 채팅창은 폭포처럼 쏟아진다.)

[실시간 구출 찬성률]

1번(무연고 빈곤 노인): 8.45%

2번(축구 선수): 98.87%

3번(시한부 환자): 14.11%

4번(쉬었음 청년): 3.24%


군중: "1번, 내버려두면 자연사 아냐? 심지어 무연고면 잘 됐네."

군중: (술렁이며) "아 2번은 그 선수네... 연락두절 됐다고 하더니."

군중: "4번 찬성한 사람은 누구냐? 뇌가 없나? 일도 안 하고 노는 놈한테 내 세금 1원도 주기 싫다."

군중: "3번은 좀 불쌍한데... 근데 250억 들여서 살려놔도 약값 없으면 곧 죽는 거 아님? 시한부한테 250억은 가성비가 너무 떨어짐."


경매인: (낮게 웃으며) 가성비라... 인격보다 수익률이 중요한 시대군요. 자, 그럼 정보를 조금 더 팔아보겠습니다. 정보를 알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대로 2번만 살리고 끝낼까요?

비서실장: (땀을 닦으며) 정보를... 정보를 더 공개해!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해!

경매인: (비웃으며) '변별'하고 싶다는 뜻이군요. 좋습니다. 이번엔 정보 이용료로 100억이 추가되었습니다.


(1번 방 위에 낡은 훈장과 낙동강 전투의 흑백 사진이 겹쳐진다.)

경매인: 우선 1번 노인. 그는 1950년 가슴에 포탄 파편을 맞으면서도 고지를 지켰던 국가유공자입니다. 그가 지킨 이 땅 위에서 당신들이 지금 투표를 하고 있죠. 그는 소년병으로 징집되어 다리 하나와 손가락 세 개를 잃었습니다.

(순식간에 1번의 수치가 89.92%로 치솟는다. 채팅창에는 태극기 이모티콘이 도배된다.)

군중: "와, 이건 살려야지! 우리가 사람이냐? 영웅을 버리게?"

경매인: 자, 그럼 2번 선수의 정보도 하나 더 드릴까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이 국격의 상징은, 지난 5년간 1,000억 원의 세금을 탈세했습니다.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자신의 왕국을 세운 자죠.

(2번의 수치가 수직 낙하한다. 49%와 51% 사이에서 횡보하는 모습을 보인다. "배신자", "도둑놈"이라는 비난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그의 지지층은 견고하다.)


(전광판의 수치가 요동치는 와중에 경매인이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경매인: 100억짜리 정보가 여러분의 정의감을 춤추게 하는군요. 자, 이제 가장 '가성비' 안 나온다고 욕먹던 3번(시한부 환자)와 4번 (쉬었음 청년)의 정보를 마저 공개하죠. 이번에도 정보 이용료는 100억입니다.

(투표 결과: [정보 공개 찬성: 88.4%] - 이제 군중은 정보를 사서 '거를 놈'을 고르는 행위에 중독되었다.)


(3번 방의 불투명 유리가 투명해지며, 곰 인형을 안고 잠든 5살 소녀의 모습이 비친다. 화면엔 '순수성: 측정 불가'라는 자막이 뜬다.)

경매인: 3번 인질. 여러분이 '남은 시간 대비 가성비'를 따지던 시한부 환자입니다. 이 아이에게 약값만 있다면, 그 해맑은 미소로, 그 존재 자체로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군중: "아... 너무 귀엽다... 저런 애를 어떻게 죽여? 살리고, 약값도 우리가 지불하자. 20억? 우리가 야식 한 번씩만 안 먹어도 돼!"

(3번의 구출 찬성률: 18.11% → 92% 로 상승한다.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라는 귀여운 폰트가 전광판에 도배된다.)


(4번 방 위에 S대 졸업장과 각종 고득점 자격증들이 홀로그램으로 쏟아진다.)

경매인: 4번 인질. 그냥 노는 청년인 줄 알았죠? 아닙니다. 국내 최상위권 대학 졸업, IQ 150, 3개 국어 능통자입니다. 단지... 사회적 시스템에 회의를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한 것뿐이죠.

군중: "야, 뭐야? 완전 엘리트잖아? 내가 저 머리면 사업해서 연간 수 억씩은 벌었다"

경매인: 하지만 이 청년은 조건이 있습니다. "구출되어도 나는 일하지 않겠다. 그저 숨만 쉬며 살고 싶다"고 하는군요. 자, 국민 여러분. 생산성을 거부한 천재입니다. 그래도 살리시겠습니까?

군중: "일 안 할 거면 왜 살려? 세금 도둑 아냐?"

군중: "살려줄 거면 국가 자산으로 관리하면서 '강제 노동 형벌'을 내리자. 그게 싫으면 그냥 죽게 둬."


경매인 (목소리): 잔인하군요. 탈세범은 '재능'이 있다고 살리고, 아이는 '귀여움' 때문에 살리면서...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청년은 폐기처분이라니.

군중: 그게 사회적 합의다! 사회는 기여하는 자들의 공동체야!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놈한테 줄 자리는 없어!


(전광판의 수치가 '구출 반대 95.76%'에서 멈춰 서늘한 긴장감을 자아낼 때, 경매인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경매인: 아, 방금 재미있는 입찰이 들어왔습니다. 4번 인질이 직접 제안을 해왔군요. 본인의 추가 정보를 공개하는 데 드는 비용 100억, 본인이 직접 '셀프 결제'하겠답니다. 심판받기 위해 자기 돈을 쓰겠다니, 참으로 신사적인 인질 아닙니까?

(비서실장과 대통령이 서로를 경악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전광판에 4번 인질의 학력 옆으로 새로운 데이터 시트가 흐른다. '가족 자산: 강남 소재 빌딩 및 현금 자산 약 1200억'이라는 문구가 붉게 점멸한다.)


경매인: 제가 중요한 정보를 하나 빠뜨렸군요. 이 청년은 사실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남겨준 유산만으로도 평생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재력이 있거든요. 여러분의 세금을 단 1원도 축내지 않는 '자급자족형 무위(無爲)'인 셈이죠. 오히려 그는 가만히 앉아 투자로 벌어들이는 배당과 이자 소득만으로, 여기 계신 여러분 수백 명의 근로소득세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국가에 상납하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채팅창의 분위기가 반전된다.)

군중): "아, 그럼 인정이지. 지 돈으로 지가 쉬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래?"

군중: "아까는 우리 세금 뺏어 먹는 식충이인 줄 알았지. 자기 돈으로 쉬는 거면 그건 '라이프 스타일' 아님? 부럽다 진짜."

군중: "갑자기 태도 돌변하는 거 봐라... 근데 솔직히 돈 많으면 일 안 해도 무죄지. 저 머리에 저 돈이면 그냥 즐기며 살라고 해."

(전광판 수치: [구출 찬성: 4.24% → 81.12%] 급반등)

비서실장: (안도하며) 다행이군요. '세금 낭비'라는 프레임이 사라지니 여론이 바로 돌아섭니다. 대통령님, 이제 4번은 확실히 살릴 수 있겠습니다. 역시 돈이 무섭긴 무섭네요.

대통령: (전광판 속 4번의 실루엣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웃기는군.

비서실장: 예? 뭐가 말씀이십니까?

대통령: 가난한 자가 쉬면 '나태'이고, 부유한 자가 쉬면 '철학'인가?

비서실장: 그게... 대중의 생리 아니겠습니까. 자기 주머니에 손을 안 대면 관대해지는 법이니까요.


[제3장: 마지막 입찰자]

(투표가 종료되고 전광판에는 [1, 2, 3, 4번 전원 구출 확정]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비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푼다.)

비서실장: 대통령님, 끝났습니다. 결국 자본이 논란을 잠재웠군요. 이게 바로 자본의 효율입니다.

대통령: (허망하게 전광판을 응시하며) 저들을 구한 게 우리인가, 아니면 저들의 '가격표'인가.

경매인: (낮고 차가운 웃음) 역시 대한민국답군요. 돈이 있는 무위(無爲)는 박수를 받고, 돈이 없는 무위는 노예가 되어야 한다... 완벽한 결론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이 경매엔 '보이지 않는 상자'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무대 바닥에서 서서히 다섯 번째 상자가 솟아오른다. 숫자 5가 적힌 상자 위로 데이터가 흐른다.)

[5번 인질 정보 공개]

스펙: S대 졸, IQ 150, 3개 국어 능통.

상태: 3년째 쉬었음 청년. (여기까지 4번과 완벽히 동일)

자산: 0원. (무일푼, 무연고자)


경매인: 자, 5번 인질입니다. 4번과 똑같은 머리를 가졌고, 똑같이 쉬고 싶어 하죠. 유일한 차이는 그의 통장 잔고가 '0원'이라는 것뿐입니다. 자, 국민 여러분. 이 5번에게는 얼마를 입찰하시겠습니까?

(전광판 수치: [5번 구출 찬성: 0.124% / 구출 반대: 99.876%])

비서실장: (당황하며) 범인! 이건 약속에 없었잖아! 이미 4번까지 다 살리기로 합의했어! 5번은 무시해!

대통령: (상자 5번을 다가가 어루만지며) ...아니, 이게 진짜 시험이었군.

경매인: (음성 변조가 풀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아버지... 보이나요? 똑같은 인간인데, 통장에 찍힌 숫자 하나에 당신의 국민들이 저를 '폐기물'로 부르는 저 광경이요.

대통령: (목소리를 듣고 얼어붙으며) ...현수? 너, 현수니?

비서실장: (경악하며) 대통령님, 그게 무슨... 경매인이 설마 의절했다던 아드님입니까?

경매인: 아니요, 진짜 저는 여기 5번,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쉬었음 청년'입니다. 국민들은 이미 결정했어요.

비서실장: 현수야, 이건 투표일 뿐이야! 현실은 달라!

경매인: 아니요, 이게 진짜 현실이에요. (상자 5번 안에서 총을 장전하는 금속음이 들린다.)

대통령: 현수야, 그건... 시스템이...

현수: 아니요, 이건 당신이 만든 세상입니다.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폐기물'이 되는 세상.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의 목숨에 가치는 공평하게 없어요. 가치가 없기에 팔 수도 없고, 숫자를 매길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0원짜리 목숨을 끊음으로써, 당신들의 그 더러운 계산기를 부숴버리겠습니다.

대통령: 안 돼! 문 열어! 현수야!!!

경매인: (탕!— 날카로운 총성이 무대를 찢는다.)

(전광판의 모든 수치가 0.000%로 멈춘다. 1, 2, 3, 4번 상자의 문이 열리고 인질들이 멍하니 걸어 나오지만, 5번 상자 아래로는 붉은 피가 서서히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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