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생각 10
회사에 업무용 포털이 있다.
페이지 하단에 '자유게시판'이라는 익명게시판이 있는데
내부망에 접속할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익명으로 글을 쓰고 댓글을 달 수 있다.
처음엔 완전한 익명이었다. 그러다 한 2~3년전부터 과한 혐오표현이나 극단적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글을 쓰면 닉네임이 고정되는 반익명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완전한 익명에 찬성했다. 직원들의 유일한 언로인 자유게시판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의 극단적 직원이 훼방을 놓더라도, 그러한 언로가 조금씩이라도 훼손되기 시작한다면 언젠가는 완전 실명제로 바뀌고 그 누구도 자신의 의견을 자신있게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를 자유라고 보고, 어디까지를 방종이라고 봐야할까.
현재의 언론과 다양한 미디어는(심지어는 일국의 대통령도) 편향적(혹은 취향존중)인 메시지를 대중에게 쏟아내기 바쁘다. 결국 정책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론이 나쁘면 좋은 정책도 사장되고, 여론이 좋으면 순전히 단기적인 정책도 최고의 정책으로 둔갑한다.
그 어느때보다 의견의 대립이 심한 시대이다. 어떤 것에 대한 어떤 의견도 극단으로 치우친다.
나는 분명 자유주의자이다.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을 추구하든 자유롭게 두어야 한다. 이건 남에게도, 나에게도 적용되는 기준이다. 그래야 내가 나로 살 수 있고, 그래야 이중적인 인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개인적 경험과 시대적 상황을 놓고 봤을 때, 도대체 이 자유를 어디까지 둬야하나 고민된다.
그럴 때는 또 책을 찾아 읽어보고 생각을 정리해본다.
(참고로 다른 번역서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책세상문고의 자유론 번역은 상당히 잘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구절만 남겨둔다.
1. 인민의 의지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인민 가운데 가장 많은 수나 가장 활동적인 일부 집단의 의지다. 즉 다수파의 의지이며 혹은 성공적으로 다수파가 된 이들의 의지이다.
- 저자의 말처럼 되는 주된 이유는 보통의 사람들은 본인만의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본인만의 생각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특정 언론이나 미디어에 의해 인식되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일 수 있다는 것을 항상 경계해야하는데 사실 나나 다른 사람들이나 모든 현상의 해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다. 저자는 여론을 경계한다. 인민의 의지인 여론이 사실 위처럼 조작 혹은 유도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 지배적인 여론과 감정의 횡포에 맞서 보호가 필요하다. 여론과 감정의 횡포란, 사회가 시민적 처벌 이외의 수단으로 자체의 사상과 관행을 이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행동 규범으로 강요하는 경향을 말한다.
- 다른 의견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저 문구를 보자마자 딱 생각났던 인물은 2010년대초에 활동하다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故성재기 씨다. 가부장주의적 시대가 끝나고 남녀평등 또는 여성의 권익향상 정신이 주류가 되던 시기였다. 성재기 씨는 남성의 권익 또한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아주 논리적이고 겸손한 태도로, 가끔은 격양된 어조로 말이다. 그럼에도 그는 남녀를 불문하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충분히 의미가 있는 주장이 많은데도 말이다. 감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그의 주장이 사회적으로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환경이었다면 오히려 워마드와 같은 극단주의적 여성주의 운동은 없었을테고, 현재와 같은 극한의 남녀대립은 없지 않았을까...싶다.
3. 이 책의 목적은 매우 간단한 원칙 하나를 확고히 하는데 있다. 이 원칙은, 법적 처벌 형식의 물리적 강제든, 여론을 통한 도덕적 압박이든, 강제와 통제라는 방식으로 사회가 개인을 대할 때 엄격히 적용되어야 한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어떤 사람의 행동 자유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당한 목적은 자기보호self-protection뿐이다. 다시 말해, 문명사회의 구성원 중 누구에게라도 본인의 의지에 반하여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목적은 타인에게 가해질 해악을 막는 데 있다. 물리적이든 도덕적이든 개인 자신의 이익은 정당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단지 강제하는 것이 그에게 더 이로운 일이기에, 강제하면 그가 더 행복해질 것이기에, 혹은 다른 이들이 지혜롭고 심지어 옳은 일이라 한다고 하여 그에게 강제로 어떤 행동을 하게끔 하거나 금지할 수는 없다. 더 많은 이익, 더 많은 행복, 남들이 볼 때 옳은 일은 그에게 충고하거나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권유하거나, 간청할 때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를 강제하거나, 그가 다르게 행동한다고 하여 불이익을 줄 이유는 될 수 없다. 만약 이를 정당화하고자 한다면, 제지하려는 행동이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칠 것이 분명해야 한다. 누구든 사회에 책임을 질 만한 행동은 오직 타인과 관련된 행동뿐이다. 단순히 본인에게만 관련되어 있다면, 개인의 독립성은 당연히 절대적이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주권자는 개인이다.
4. 사람들은 행동만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으로써 타인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으며, 두 경우 모두 그러한 피해에 대해 정당하게 책임을 져야 한다.
5. 이것이 바로 인간자유의 적절한 영역이다.~첫째, 의식의 내면적 영역이다.~둘째, 이 원칙은 취향과 추구의 자유를 요구한다. ~ 셋째, 각 개인의 이러한 자유에서, 똑같은 한계를 두고, 개인들 간 결사의 자유가 도출된다. ~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려 마땅한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 한, 타인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의미한다.
- 우리 사회에는 더 좋은 방향이 있다면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때로는 '강제'하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서 그러한 결정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다. 그것이 그 선택을 하는 개인에게 해를 미치더라도 말이다(물론 살지 않을 권리, 노예가 될 권리와 같은 것은 저자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원칙은 아무래도 경계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것이 '해'인지, '이익'인지 그것은 개인의 판단과 경험, 성격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데 더 옳은 방향이 있다고 한번 강제하기 시작하면 애매했던 '선'은 점점 개인만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그러나 도덕적 억압의 기제는, 사회적 문제에서 생겨나는 차이보다는, 개인 자신과 관련된 문제에서 주류 의견에서 이탈하는 것을 억누르는 데 더 강하게 쓰여왔다.
- 여러 글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내가 남겼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죄와 악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시대정신이 죄를 만들고 악을 만든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절대선이나 절대악이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파생되는 도덕이란 관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도덕의 고무줄이 시대정신의 부름에 따라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도 이에 맞춰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이 정해진다. 절대적 존재를 믿는 분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최소한 내 발 아래, 나의 가족이 살아왔던 이곳에서 절대적 기준은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 보통은 도덕적 억압 기제에 맞춰 산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정해둔 기준에 따라서만 살게 되면 그 안에서만 사고할 수 밖에 없다. 더욱 진전된 사고, 더욱 진전된 사회 아니면 아예 새로운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기준을 벗어난 사고와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선구자는 외로운 법이다. 나는 외로울 자신은 없다. 그래서 어렵다.
7. 모든 인류가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똑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고, 그 한 사람이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류가 그 한 사람의 의견을 침묵시키는 것은, 그 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을 때 전인류를 침묵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당하지 않다.
8. 어떤 의견의 표현을 금지하는 일은 특별한 해악을 일으킨다. 인류 전체를 약탈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해악은 현세대만이 아니라 미래의 후손까지 미친다. 특히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피해를 입는다. 만약 어떤 의견이 옳다면, 사람들은 오류를 진리로 바꿀 기회를 박탈당한다. 만약 어떤 의견이 틀렸다면, 사람들은 진리가 오류와 충돌할 때 생겨나는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생생한 인상을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 모든 의견은 자유롭게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했으나, 논리적 근거를 대보라고 하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막막했는데 이젠 할 말이 생겼다.
9. 우리가 가장 정당하다고 확신하는 믿음조차 계속 검증에 열려 있어야 한다. ~ 검증에 열려 있다면, 우리는 현재 인간 이성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 현재의 과학이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의 이론에 대해 끊임없이 반증과 반론을 이어나가는 문화가 자리잡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패러다임의 변화'가 인정된다는 것이었다. 과학은 그렇다.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이론과 반박, 그러면서 계속 발전한다. 더욱 효율화된다. 아쉽게도 정치나 인문학은 그러한 과정이 도입되기 어렵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며 반대편의 이론을 일부흡수하는 사례도 있으나, 소수에 불과하다. 과연 민주주의가 인간사회가 평화롭게 유지되는 데 가장 올바른 정치체제일까? 아니 애초에 인간이 평화롭게 사는 것이 과연 인간의 본질을 추구하는데 필요한 것일까? 본질은 뭘까? 이렇듯 어느 하나,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보니 발전이 더디다. 후퇴하기도 한다.
10. 우리 사회에서는 매 10년마다 혹은 한 세대마다 눈에 띄게 부상하는 이단적 이견이 없다.~이런 식으로 일부 사람들이 매우 만족할 만한 상태가 유지 된다. ~ 그러나 이런 지적 평화를 위해 인간 정신이 발휘할 수 있는 온전한 도덕적 용기를 희생하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 말이 나온 김에 이단적 의견을 하나 제시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스라엘에는 근본주의 유대교 종파를 일컫는 '하레디'라는 집단이 있다. 이들은 국가 존속에 필요한 의무를 거부한다. 경제활동도, 국방의 의무도 거부한다. 이들에게 국가 존속을 결정하는 투표권을 줘야할 필요가 있을까? 나라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개 종교집단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러한 논리로 우리나라에도 국민에겐 헌법상 4대의무가 있다. 국방의 의무/납세의 의무/교육의 의무/근로의 의무 이렇게 네가지이다. 이 중 반절도 수행하지 않는(못하는이 아니라) 사람에게 굳이 투표권을 줘서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게 할 이유가 있을까? 만민평등이라는 기초사상부터 송두리째 흔드는 주장이지만 세계가 점점 더 파편화되고 극단화 되는 요새같은 시점에서는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11. 정통적인 결론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질문을 금지하는 조치로 인해 퇴행하는 것은 이단자들의 정신이 아니다. 가장 큰 해악을 입는 것은 이단이 아닌 사람들의 정신이다. 이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이들의 전반적인 정신 발달이 억눌리고 이성이 위축된다. 수많은 유망한 지성인들이 불경하거나 부도덕하다 여겨지는 결론에 빠지게 될까 두려워 대담하고 활기차며 독립적인 사고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가지 못한다면 이 세계가 무엇을 잃어버릴지 계산할 수 있겠는가?
- 흔히 우리가 정통적인 결론이라고 얘기하는 것들에게 또한 반론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본인이 독실한 개신교라고 주장하는 인물일수록 이단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분석하고 정통적 의견에 비해 무엇이 다른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지적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논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12. (초기 기독교에 비해 현재 기독교는) 믿음이 습관이 되었다.
13. 잘 알려진 사실을 외면하는 것은 진리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한가지 기억나는 경험이 있다. 회사 동료 중에 본인의 종교에 대해 아무리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다고 해도, 열린 자세로 끝까지 듣는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 사실에 대한 반론도 일리가 있다면 진심을 다해 고민하고 해답을 가져오곤 했었다. 그러기 위해 수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14. 인류의 정신적 행복-모든 다른 행복이 달려 있는-을 위해 의견의 자유와 의견을 표현할 자유가 필요하다는 네가지 명확한 근거를 요약하면
- 첫째, 어떤 의견을 강제로 침묵시킨다고 할 때,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그 의견이 진실일 가능성이 있다. 이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의 무오류성을 가정하는 것이다.
- 둘째, 침묵시킨 의견이 오류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는 진리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매우 흔하다. 어떤 주제에 대한 일반적이거나 지배적인 의견이 온전한 지리인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상반된 의견의 충돌을 통해서만 나머지 진리를 보완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셋째, 널리 받아들여진 의견이 단순히 진실일 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력하고 진지하게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거나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이를 받아들이는 대다수 사람은 그것을 합리적 근거를 둔 이해나 공감없이 편견에 찬 방식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 넷째, 교리 자체의 의미가 잊히거나 약화되어 사람들의 개성과 행동에 미치는 활기찬 효과를 잃을 위험이 있다. 이런 경우 교리가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진정한 믿음과 진심 어린 확신이 성장하는 것을 차단할 뿐만 아니라, 선을 위한 효력을 상실한 채 단순한 형식적 주장으로 전락하게 된다.
- 왜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필요하고 허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군가 구체적으로 답변해보라고 한다면 이 문장을 인용하면 되겠다. 물론 나도 여기에 대해 논리적 오류는 없는지 확인해야 할테고, 반대의견도 충실히 검토해야만 한다.
15. 불쾌감은 공격이 효과적이고 강력할 때마다 생겨난다.
- 약간 유행이 지나긴 했지만 '긁?' 이라는 표현이 있다. '긁혔냐?' 또는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냐' 뭐 이런 뜻인데 보통은 팩트폭행을 하고 나서 상대가 불쾌해 할때 한층 더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으로 쓰인다. 그렇다. 주장이 효과적이면 상대는 반론보다 불쾌감을 먼저 표한다.
16. 논쟁을 벌이는 이가 범할 수 있는 이 같은 유형의 최악의 잘못은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나쁜 사람이나 비도덕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다.
17. (반대에서는) 이 무기를 자신에게 안전하게 사용할 수도 없으며, 설령 사용한다고 해도 자신의 목적에 반작용을 일으킬 뿐이다. 일반적으로 공통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에 반하는 의견은 신중하게 절제된 언어를 사용하고 불필요한 모욕을 철저히 피해야만 청중에게 호소할 수 있다.
- 앞선 故성재기 씨의 사례와 같다. 혹은 지난 10년 내내 있어왔던 이재명 악마화 작업과도 연관지을 수 있겠다. 지금은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재명을 향한 공격은 민주당과 국민의힘 또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진행됐다. 특히 조폭출신이라거나, 인성에 문제가 있다거나 그런류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이 일부 사실이라 하더라도 전체를 호도하는 방식은 옳지 못했다.
18.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문제라면 개별성individuality을 그 자체로 발휘할 수 있어야 바람직하다.
19. 인간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이 부과하는 한계 내에서 개성을 일구고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들 안의 개성을 모두 닳아 없어질 때까지 획일화하기 때문이 아니다.
20. 각자의 본성을 공정하게 발휘하게 하려면, 반드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삶을 살도록 허용해야 한다.
- 이 책을 스위스, 프랑스, 하와이를 여행하며 읽었다. 내 인생에 가장 호사스러운 2~3주간이었다.
-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 어떤 역사나 건물보다는 거기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인종이 어떤 말을 하면서, 어떤 생활양식으로 살아가는지 다양성을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 어떤 대륙에 비하더라도 동아시아는 폐쇄적인 지역이다. 자유롭게 본인만의 개성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은 달랐다. 자신만의 색깔로,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다. 물론 그 안의 구체적인 속사정은 알 수 없겠지만 밖으로 보이는 외형은 그렇다는 것이다.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들이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개별성 자체도 유사하게 발전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국인으로서 이 나라 사람들은 인생의 목표가 다양하지 않다는 생각은 뿌리칠 수가 없다. 대부분의 관심사가 사회적으로 '거세'되어 있다보니 부와 지위 젊음과 외모 이런 것들 말고는 나의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개별성을 드러내는 것이 인간의 특성이라면 한국이라는 사회는 앞서 언급한 가치들말고는 드러낼 수단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들이 지니는 상대적 위치가 중요해져버리는 것이고, 피곤한 경쟁사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21. 천재는 항상 소수에 불과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천재를 배출하려면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보존해야 한다. 천재는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다.
- 저자가 각자의 본성을 발휘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천재'를 위해서이다. 세상을 발전시키는 소수말이다. 우리 시대의 천재는 누가 있을까? 딱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관찰해보기 바란다. 일반적인 우리와는 다를 것이다. 다순히 머리가 좋다거나 외모가 뛰어나다거나 한 것이 아닌 다른 반짝이는 무엇인가가 그들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온전히 발현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만 한다.
22. 정치에서 여론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은 이제 진부하다.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 유일한 권력은 대중의 권력, 그리고 대중의 성향과 본능을 대변하는 동안 정부가 누리는 권력이다.
23. 더욱 놀라운 것은, 대중이 더는 교회나 국가의 고위 인사들, 명목상의 지도자들, 혹은 책에서 의견을 취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고는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신문을 통해 즉흥적으로 그들에게 거는 말이나 그들의 이름 즉 대중을 내건 말에서 비롯된다.
- 22번과 23번의 내용에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이해가 부족할 수 있겠으나, 언뜻 이해한 바로는 22번에서는 지도자는 대중의 목소리를 따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얘기하면서 23번에서는 대중은 조작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조작 또는 프레이밍의 주체는 누구인가? 결국 사회 엘리트 계층이다. 과거와 달리 휘발성 강한 매체와 의견를 사용하긴 하나 결국엔 '대중은 선동당한다'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교회나 국가의 고위 인사들 또는 책과 같은 구 매체 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엘리트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한다는 결론 밖에 도출되지 않는다.
24. 이처럼 인민은 일정 시간 동안 진보하지만, 순간 멈추어선다. 그 시점은 언제일까? 그 인민이 개별성을 잃었을 때이다.
- '개별성을 잃었을 때'라는 말이 많은 걸 함축하고 있다고 느껴진다. 개인의 개별성을 잃은 사회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회가 되고, 어떠한 진리에 대해서 다른 의견을 낼 수 없다면 저자가 주장한 것과 같이 진리(발전)을 이뤄낼 수 없다. 결국 사회 분위기가 중요하다.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 실패를 용인하는 사회,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경청하는 사회... '위대한 미국'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이토록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실제로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위와 같은 것들을 용인하는 사회분위기가 아주 큰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25. 이러한 모든 요인들보다도 인간들 사이의 일반적인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데 더욱 강력한 요소는 이 나라와 다른 자유 국가에서 완전히 자리 잡은 여론의 우위이다. 다양한 사회적 특권이나 지위가 점차 평준화 됨에 따라, 과거 이러한 특권과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이 다중의 의견을 무시할 가능성이 줄어든 상태다. 또한 공중이 자기 의지를 명확히 밝힐 경우, 그 의지에 저항하는 발상 자체가 실천적인 정치인들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간다. 이로 인해 순응하지 않는 경향을 뒷받침하는 어떤 사회적 기반도 사라져버린다. 다시 말해, 수의 우위에 맞서면서 공중의 의견과 상반되는 견해나 개성을 보호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력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 삼권분립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통치구조일테지만, 중요한 사회변화의 길목에서 헌법재판소의 역할이 상당히 두드러진다고 생각한다. 세종시 수도이전 사례, 몇건의 탄핵재판, 통진당 해산 그리고 다수의 헌법불합치 결정 등. 헌법재판소가 정확히 민의를 대변한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민의가 어떠한 형태이든간에 결국엔 법률의 형태로 국회를 통과하기 마련이고 대법원은 판례를 통해 나름의 해석을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결국 법률의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공포된(대통령 거부권은 공포조차 안되는거니) 법률자체의 위헌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공중의 의견과 상반되는 견해를 낼 수 있는 기관이 있다. 재판소 구성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는 직선제, 간선제 등 다양한 방법을 도입할 수 있겠지만 현재는 간선도 아니고.. 인선의 형태라 아쉽다. 향후 개헌논의가 활발해지면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대한 문제도 심도 깊게 논의될 수 있다면 좋겠다.
26. 다른 사람들이 그의 판단을 돕기 위해 고려할 사안들을 알려주고, 그의 의지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 충고하거나 심지어 강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종적은 판단은 그 자신에게 달려 있다. 물론 그가 충고와 경고를 무시하고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몯느 실수는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강제할 때 발생하는 해악에 비하면 훨씬 작은 것이다.
27. 두 격률, 첫째, 개인의 행동이 본인 외에 누구의 이익에도 관련이 없는 경우, 개인은 그 행동에 대해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 사회가 그의 행동에 불쾌감이나 반감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하게 정당한 수단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조언, 교육, 설득, 또는 때에 따라 회피하는 일뿐이다. 둘째, 다른 사람들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해동에 대해서 개인은 책임을 지며, 사회가 사회 자체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그 행동에 대해 사회적 또는 법적 처벌을 할 수 있다.
28. 정부의 예방 기능은 처벌 기능보다 자유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데 훨씬 남용되기 쉽다.
- 정부의 사전적,예방적 역할을 어디까지 둬야할 것인가는 예민한 문제다. 이전에 밀란 쿤데라의 '농담'과 관련된 글에서도 얘기한적 있지만 점차 정부는 작은 것이 맞다는 생각에 가까워지고 있다. 후술되겠지만 정부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개인의 업무역량 한계/관리의 용이성/인사이트 도출 과정에서의 평준화 경향 등과 같은 이유때문에 정부는 어떤 문제든 획일화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다. 획일화는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많은 것들을 놓치게 한다. 많은 것들을 놓치면 결국 효율성은 떨어진다. 오히려 자유롭게 두고 그들의 활동을 지지해주는 것이 효율적이다. 사회는 굽이치는 강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식이든 물길을 막으면 언젠가 뚫리게 되어 있고, 사실은 뚫린 그 길이 강물의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적인 움직임인 것이다.
29. 많은 경우 개인들이 정부 관료들보다 평균적으로 특정 일을 더 잘 수행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개인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개인들에게 이런 경험은 정식적 교육의 수단이 된다. 이런 일을 통해 자신의 능동적 역량을 강화하고, 판단력을 단련하고, 자신이 다루는 사안과 관련해 필요한 지식을 익힐 수 있다.
- 지방자치제도가 그럼에도 시행되고 있는 이유. 이재명 같은 언더독이 대통령까지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이재명이 정말 위대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누구든 제2, 제3의 이재명식 대통령직 쟁취 방법을 따라갈 수 있다는 점이 고무적인 것이다.
30. 정부의 운영은 어디서나 획일적인 경향이 있다. 반면 개인과 자발적 협회는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으며, 다양한 경험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국가가 유용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이러한 다양한 실험에서 나오는 경험을 중앙에 축적하고 적극적으로 전파하며 확산하는 역할이다.
31. 정부의 개입을 제한해야 하는 ~ 정부권력을 불필요하게 확대할 때 생겨나는 큰 해악 때문이다~ 국가의 모든 고급 인재가 정부의 서비스로 흡수된다면~국가 내의 모든 고급문화와 숙련된 지성은 다수의 관료에 집중될 것이다~대중은 자신들이 해야할 모든 일에 대해 지시와 지도만을 바라고, 능력있는 야심가들은 개인적 신분 상승을 목표로 관료제를 지향하게 될 것이다.
- AI가 국가의 명운을 결정할 것이라는 담론이 현실이되고 있는 상황이다. 겪어봐서 알지만 관료제로는 혁신을 이뤄낼 수 없다. 관료제는 현상유지에는 적절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국가가 발전하려면 관료는 전면에 나서선 안된다. 본인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할텐데 현재 대한민국의 관료제는 직선제와 연동되어 있다보니 가끔은 이상한 방식으로 작동하곤 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에서 하고 있는 손목닥터9988과 같은 사업이다. 사업에는 몇백억의 예산이 들어가고, 목표는 시민의 건강증진인데...이걸 왜 서울시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복리후생을 두텁게 하는 것이 서울시의 책무는 맞다. 하지만 단순히 열심히 걷기만 하면 현금화할 수 있는 포인트를 지급하는 것이 서울시의 책무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시민건강을 그런식으로라도 유도해서 건보재정을 아끼겠다면 그건 사실 건강보험공단에서 해야할 일이고, 그 건강정보를 외부 민간기업에 공유하면서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어보이고, 그렇다고해서 그러한 정보를 서울시가 수집해서 배포할 수 있는지.. 당연히 법적으로 불가할테고. 심지어는 보편복지가 아닌 선별복지를 주장해왔던 현시장과의 정책적 지향점과도 반대되는... 알 수 없는 사업이다.
- 결국 이런 것들이 관료제와 직선제가 혼합된 형태에서는 혁신으로 포장된다는 것이 문제다.
32. (번역가) 그렇기에 밀에게 토론이란 우리가 각자의 '오류가능성'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관용하며 경청하고, 나의 부족한 측면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보완하는 이성적 과정이다.
33. (번역가) 많은 이들이 인간 발전의 원동력은 보편적 요소로서 이성이라고 믿은다. 하지만 다양한 감정에서 발산되는 행위들 역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34. (변역가) 무엇보다 밀이 자유론에서 경계했던 것은 자신의 믿는 바에 대해 무오류를 가정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신념에 오류가 없다는 믿음은 극단주의로 치닫기 십상이다.
- 번역가의 글에서 가져왔다.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에서도 인간 발전의 원동력을 도출할 수 있다는 밀의 주장이 어떤 근거였는지 찾아봐야겠다.
-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