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농담 - 밀란 쿤데라

독서와 생각 9

by 호랑이아저씨

나는 문학을 모른다.

심상이 어떠하고, 표현이 어떠한지.

시대상은 이렇고, 당시의 문학사조는 이렇고,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인지.


분석하려 하지도 않거니와, 분석할 능력도 재능도 집중력도 없다.

그저 읽는다.

하나의 이야기로 읽는다.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글로 표현할 수도 없다.

짙은 안개에 종종 실려있는 어떤 냄새와, 어떤 온도를 느끼듯 길을 헤매다가 특정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총체적 이해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인상적 구절만 남겨둔다.


1. 뒤이어 곧 내 안에서 (시대 정신에 맞추어) 내가 되어야만 하고 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 나는 무엇인지 모를 때가 있다. 왜 여기에, 이까지 왔는지 답을 알고 싶을 때가 있다. 없는 걸 찾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예정된 운명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가끔은 '신'을 찾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기도 한다.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에서 오는 공허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을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직전에 읽었던 유발하라리의 직관과 일치한다.


2. 아니다. 모든 것이 진짜였다. 위선자들처럼 내게 진짜 얼굴 하나와 가짜 얼굴 하나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나는 젊었고, 내가 누구인지 누가 되고 싶은지 자신도 몰랐기 때문에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얼굴들 사이에 존재하는 부조화가 내게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중 어느 것에도 꼭 들어맞질 않았고, 그저 그 얼굴들 뒤를 맹목적으로 이리저리 헤매 다니고 있었다.)

- 10년전쯤 만났던 선배를 지금 직장에서 오며가며 만나게 되었다. 그는 기자였고 지금은 부장기자 좀 되는 듯했다. 그때는 그 세상이 그렇게 멋지고 커보였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뭔가를 이루고, 뭔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그는 지금도 멋지다. 그 때와는 달리 언론계에서 영향력도 커졌을 것이다. 허나 이제는 더 이상 커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 하지 않는다.


3. 그래서 이 조상 전래의 행사라는 맑은 샘물에서 얼핏 클로로포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엇다.

- 박제할 때 클로로포름을 쓴다. 살아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참신하기도 하고, 진부하기도 한 표현이다.


4. 나는 인간의 운명을 심판하는 최고재판소에 비치된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를 도저히 바로잡아 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이 이미지(아무리 나와 비슷하지 않다해도)는 나 자신보다 비교할 수도 없이 더 실제적이며, 그것이 나의 그림자가 결코 아니라 나, 바로 나 자신이 내 이미지의 그림자였다. 왜 나를 닮지 않았느냐고 그 이미지를 탓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며, 이미지와 다른 것은 내 잘못이었다. 그리고 이 다름은 바로 나의 십자가, 그 누구에게 떠넘길 수도 없고 내가 짊어지고 가야하는것으로 선고받은 십자가였다. 그런데도 나는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진짜로 나는 나의 그 다름을 짊어지기를 원했다. 즉 내가 아니라고 판정된 그 사람으로 계속 살기를.

- 계획적이고 엄중한 것들을 아주 조금 비틀어 만들어내는 것이 농담이다. 책의 뒤편에도 다른 화자의 입을 빌려 나오는 얘기지만, '농담'은 계획/엄중/규율/시멘트/강철 등 세상을 무겁게 짓누르는 것들을 부식시킨다. 모든 것을 삭아없어지게 하는 녹이다. 하지만 이 녹은 강철같은 사회규율만 삭아 없어지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내 인생의 비극도 마찬가지다. 시간의 흐름은 주인공인 루드비크에게 농담하듯 비극을 희극으로 비틀어 버린다.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다.

- 처음엔 자유에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뒤로 갈수록 부질없는 거대담론, 부질없는 복수심, 부질없는 나만의 신화가 시간에 녹아 없어지는 글이라고 느껴졌다. 인생이 거대한 농담인 것이다.


5.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 주는 것은 없다. (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 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그러자면 자신 속에 형성되어 있는 정신적 태도라든가 꾸며낸 행동과 몸짓들을 버리고 아주 단순하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내가(단번에, 준비도 없이)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수많은 가짜 얼굴들 뒤에서 눈먼 사람처럼 늘 길을 더듬던 내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것은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 기적 같은 해방으로 느껴졌다.


6. 우리는 역사라는 말 위에 올라탔다는데 취했고, 우리 엉덩이 밑에 말의 몸을 느꼈다는 데 취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결국 추악한 권력에의 탐욕으로 변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동시에 아름다운 환상이 있었다. 사람이 이제 역사의 바깥에 머물러 있거나 역사의 발굽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를 이끌어 나가고 만들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우리, 바로 우리가 여는 것이라는 그런 환상이었다. 나는 그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나서는 삶은 삶이 아니라 반 죽음이며, 권태이고, 유배이고, 시베리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나는 갑자기,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완전히 새롭고 예상치도 못햇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내 앞에는 이제 전속력으로 비상하는 역사의 날개 아래 가렸던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잊혔던 일상이라는 초원, 소박하고 가난한, 그러나 충분히 사랑할 만한 여인, 루치에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

- 내게는 공명심이라는 게 있다. 일을 한지 5년이 넘은 지금도 무엇인가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그러나 일을 하면서 자주 느끼는 것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세상사 흘러가는 것이 예전엔 저런 수레바퀴나 거대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으로 해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 거대한 기계의 방향타를 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상상해보곤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 내 생각이 계속 기운다. 기계가 아니라 거대한 강이다. 막으면 쌓이고, 쌓이면 터진다. 흘러가게 두어라. 아니, 오히려 잘 흘러가게, 하던 것을 잘 할 수 있도록 두면 알아서 땅을 만들고 길을 낸다. 물론 아닌 것도 있다. 소외되는 것도 있다. 그럼 그 때 그 부분에 대해서만 나서면 되는 것이다. 조바심낼 것 없다.


7. 그녀는 역사 아래에서 살았다.역사에 대한 갈증도 없었다. 거대하고 일시적인 일들은 전혀 몰랐고 다만 작고 영원한 자신의 문제들을 위해 살았다.

- 글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단순하게만 보면...루드비크는 최정상에서 고꾸라진 인간이다. 시대가 요새 말로 억까한 인간이다. 하지만 본인이 가진 명석한 기질로 살아남고 복수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시간이 흐릿하게 만들어버린 뒤다. 루치에는 루드비크와 반대다. 바닥이고, 그 위는 상상하지 않는다. 불행한 인생이나 행복할 줄 안다. 제마네크는 최정상에서 최정상으로 인생을 이어간다. 허나 시간은 그를 최고로 만들었던 사상조차 낡은 것으로 만든다. 그는 적응한다. 루드비크 입장에서는 최악이다. 잔혹한 살인마가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목사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헬레나, 제마네크의 아내이자 루드비크가 제마네크에 복수하기 위해 이용하는 대상. 남편에게 버림받고, 정부인 루드비크에게도 버림받아 최후의 선택을 하지만 그것은 고작 끝없는 설사였다. 어찌보면 그런 농담같은 상황이 그녀를 살린 거다.


8. 어찌됐거나 젊은이들이 연기를 하는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 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 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리고 연기를 한다.


9. 그렇다, 나의 전락에는 그 어떤 진짜 드라마도 선행하지 않았고, 나는 내 이야기의 주체라기보다는 차라리 대상에 가까웠으며, 그러므로(괴로움, 깊은 슬픔, 실패 등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내 이야기를 가지고 무언가 대단한 척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10. 나는 다시 돌아올 수 없이 떠나 버린 그 처녀성의 화관을 보고 잇었다. 그렇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이.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 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11.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타인들의 찬동도 없이, 오로지 자기 자신과 대면한 채 홀로 고립되어 용감함을 고수하는 일은 엄청난 자긍심과 힘을 요하거든


12.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 스스로가 맡을 것이니, 그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다"


13.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구는 천상과 지옥 사이의 경계에 있다. 그 어떤 행위도 그 자체로서 좋거나 나쁘지 않다. 오로지 어떤 행위가 어떤 질서 속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만이 그 행위를 좋게도 만들고 나쁘게도 만든다.


14.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어떠한 위대한 운동 앞에서도 조소와 우롱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부식시켜 버리는 녹이기 때문이지요.


15. 내게는 언제나 너무도 현재적이고 생생한 그와 나 사이의 투쟁 위로 모든 것을 잠재우는 위무의 물결이 파도처럼 덮쳐 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시간의 물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모든 시대들 사이의 차이들마저 다씻어 가버리는데, 하물며 보잘것없는 두 개인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쉽게 씻어 가겠는가.


16. 이 쓸데 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17.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 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이이 되었던 주요 인물들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 더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되는것이다.


18. 그렇다, 갑자기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사람들 대부분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사람, 사물, 행위, 민족 등에 대한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 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다. 모든 것은 잊히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복수에 의해서그리고 용서에 의해서)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힐 것이다.

- 책의 주제이자 농담의 참의미. 계획된 모든 것은 어그러진다는 것을 왜 알지 못할까? 계획은 벗어나지 않기 위함이 아니라, 그때 그때 나아갈 방향만 지정해줄 뿐 결과를 담보하지 못한다는 진실을 알아야한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시간은 모든 것을 덮어 버린다. 사람은 늙고 없어진다. 사람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이다.

- 기억해야만 하는 것들은 끊임없이 상기하고 신화화 시켜야한다. 그런 작업은 멈추는 순간 휘발될 것이다. 어쩌면 국가의 가장 큰 역할은 그러한 상징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상징을 만들고 유지시키고 국민들의 마음에 남겨 놓는 일 말이다. 6.25. 라는 숫자와 날짜만 봐도, 전쟁의 고통과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나게끔 하는 것, 세종대왕이라는 어느 왕의 이름만 들어도 자부심과 따뜻한 아버지의 품이 느껴지게 하는 것. 그런 것들 말이다.


추가로 요즘 드는 생각이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국방과 외교, 사법과 치안이다. 그 외의 일은 모두 돈을 쓰기만 하면 된다. 거둬들인 세금을 어떻게든 쓰는 것. 효율적이면 좋겠지만 많이, 전부, 다, 쓰는 것이 경제 순환에 도움이 되고 부의 독점을 방지한다. 내가 어쩌다 야경국가를 지지하는 인간이 되었는지... 참 농담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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