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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이아저씨 Sep 19. 2024

제주

당신을 기억할 때 2

 제주에 대해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글을 남겼다. 나도 그들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제주라서 좋은 건지,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이어서 좋은 건지, 아무래도 그 둘이 합쳐졌을 때 ‘참 좋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이 탄생하곤 하는 것 같다. 기회가 될 때마다 제주에 있었기에 정확한 시점을 알 수는 없다. 그래도 남겨두고 싶다.


내 머리가 바쁜 일상에 쫓겨 모든 좋은 기억들을 몰아내기 전에.

웃는 모습들. 참 많이도 봤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너도 나도 많이 웃었다.




그 중 하나. 다랑쉬오름 정상, 싱긋 웃는 얼굴, 짝다리, 붉은 하늘, 맑은 하늘, 휘날리는 머리칼, 딱붙는 긴팔니트, 탁 트인 전망, 서쪽엔 한라산이 어렴풋이, 동쪽엔 성산일출봉이 어렴풋이, 초록, 하늘, 주황, 노랑. 한 데 모여 한 장면을 구성하고, 바람은 뒤에서 앞으로 불어와 내 땀을 식혔다. 정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대적으로 오르기 쉬운 바로 옆 아끈다랑쉬에서 종종 사람소리가 울려 올라왔을 뿐이다. 우리는 분화구를 따라 둘러둘러 걸었다. 이미 가을 뙤약볕에 4시간 넘게 절여진 몸과 다리였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또 걸으며 여독을 풀었다. 분화구는 깊어 보였다. 관목 사이로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는 노루 한 마리가 우리 시선을 끌었다.

입을 맞췄던 것 같다.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려가는 길, 올라오는 길은 모두 관목터널 아래로 뻗어 있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만 탁 트인 전망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반대로, 내려갈 때는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야만 했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남기고 관목터널 밑으로 내려갔다.




그 중 둘. 봄이었다. 초봄도 늦봄도 아니었다. ‘나 지금 봄입니다. 이제 곧 1년을 시작할 거예요.’라는 어느 시점이었다. 올레길 어딘가, 일본군의 비행기 격납고가 여기저기 깔려 있고 4.3사건의 위령비가 불현듯 나타났던 곳이었다. 넓게 퍼진 밭길을 따라 우리는 걷고 있었다. 흙이 좋았던 것 같다. 흙이 바람에 날렸으나 푸석한 공사장 모래바람이 아니었다. 건강한 흙바람이었다. 우리는 옅게 내려 앉은 아지랑이를 따라 한발한발 걸었다. 사진이 한 장 남았다. 흙길에 놓인 돌멩이에 핸드폰을 받쳐 두고 저만치 떨어져서 웃는 모습이었다. 흐리게 나와서 더 예쁜 봄빛깔 사진이었다.
너는 담을 따라 쑥 올라온 유채꽃을 꺾어 들고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너는 활짝 웃으면서 내게 유채꽃을 건내 주었다. 최근에 한 교정기 때문에 이전보다 입이 조금 더 튀어나와서 웃는 모습이 더 도드라졌다. “오빠 꽃은 남자가 여자한테 주는 거야. 다시 나한테 줘봐봐” 나는 다른 꽃을 더 꺾어 작은 다발을 만들어 주었다. 너는 그 날 중 가장 환한 모습으로 웃었다. 온 제주가 노랑이었다.




그 중 셋. 늦가을이었다. 우리는 이제껏 가보지 못한 곳들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운전면허를 따고, 렌터카를 빌려 탄 첫 여행이었다. 얇은 패딩이 필요한 날이 이어졌다. 서리는 아직 서지 않았다. 구불구불 한라산을 타고올라 관음사에 도착했다. 찬바람, 따듯한 유자차, 상쾌한 한라산 공기. 우리는 하염없이 걸었다.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데에는 묵묵히 한걸음씩 옮기는 것이 가장 좋은 약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불안감. 그것을 없애기 위해 산길을 거슬러 올라왔던 터였다. 부처를 뵈며, 속으로 빌었다. 나도 너도 마찬가지로 같은 내용의 무엇인가를 빌었을 것이다. 언제나 너는 나를 향해 웃음지어 줬지만, 이날만큼은 쓴맛이 받쳤다. 우리는 너른 공터를 뛰어다녔다. 절간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지 않으면,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지 않으면, 쓴맛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제주를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부처님도 그러길 원하지는 않았을 테다. 뛰고, 달리고, 낙엽에 벌러덩 넘어져 버렸다. 일부러 넘어져 버렸다. ‘헉헉헉’ ‘흐아!’ 맑은 공기에 탁한 숨을 뽑아내고 나니 살 것만 같았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우리는 서로의 말을 반복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맑고 흔들리는 눈. 맑고 거칠어진 피부. ‘잘 될 것이다’. 당신이 뜻한대로 될 것이다. 되뇌며, 되뇌며, 속세로 돌아왔다. 제주에 겨울이 오고 있었다.

                    

2017년, 2019년, 2021년 봄과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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