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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BooBoo Jul 19. 2023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살게요

재테크 03. 내가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 (1) 나눔

동네 빵집에 들어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

그러자 빵집 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더 포장해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2016년 11월 30일 수요일 오전 2시 8분.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인 서문시장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대구 서문시장은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대규모 재래시장이다.


나는 대구에서 20대 전체를 보냈다. 2010년 2월 말부터 2020년 2월 초까지 거의 정확히 10년을 대구에서 보냈지만 서문시장은 딱 1번밖에 가보지 않았다. 미역수제비였나 칼국수였나 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맛집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친구들과 한 번 갔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우리 나이 대에는 재래시장을 갈 일이 거의 없다.



평소와 다름없이 아주 평범했던 그날


화재가 발생한 날, 그때 그 시각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나는 연구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부엉이 생활이 익숙해진 터라 새벽 2~3시까지 집에 가지 않는 일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서문시장 화재와 관련된 뉴스를 찾아보니 대부분 새벽 5시 이후의 내용 밖에 없다. 유튜브를 통해서인지 뭐였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내가 살고 있는 곳과 멀지 않은 곳에서 발생한 화재다 보니 그날 이른 새벽부터 나는 이미 화재 소식을 듣고 있었다. 많이 번질 수 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일이면 12월이기도 하고 추워질 때라 금방 꺼지겠거니 하고 잠에 들었었다.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마무리가 되어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느 때처럼 남들이 점심을 먹을 때쯤 되어서야 어기적거리면서 일어나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으로 뉴스 기사를 살펴봤다. 화재는 더 커져있었고 본격적으로 기자들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도 속보 영상이 계속 올라왔다. 당시 대구에 살던 지인들이 모인 단체 대화방에서도 온종일 화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재는 이후 이틀간 계속되었다. 화재의 완전 진압에는 40시간 이상이 걸렸고 소방대원만 750명 이상, 소방차도 100대 가깝게 동원되었다. 추산으로 약 1000억 원의 재산피해와 800개 이상의 점포가 전소된 대형 화재였다.



재난현장이 된 재래시장


서문시장에는 재난현장 통합지원본부가 차려졌다. 화재가 발생하자마자 대규모 피해가 예견된 현장이었기에 대구시는 서문시장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해 달라는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정확한 기준은 모르겠지만 거절되었다. 다만 이후에 특별재난지역 수준에 이르는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상 재난으로 분류된 화재 현장은 첫날부터 적십자사, 지역의 봉사센터들로부터의 봉사활동 지원과 기부 활동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구신세계, 한국가스공사 그 외 많은 기업들이 앞다퉈 기부금을 냈고 화재가 정리되고 난 이후에는 혜리, 싸이, 박신혜, 유재석 등 많은 연예인들도 기부금 행렬에 동참했다.


대구 서문시장에 재난현장 통합지원본부


기부금도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더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 재난 발생 당일부터 화재 진압 및 주변 정리에 힘든 소방관을 포함한 국가직 공무원들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서서 봉사활동을 한 시민들이었다. 지금은 기사로 밖에 판단할 수 없고 기사조차도 접속되지 않은 링크 주소도 많아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힘들어 아쉽다. 당시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서문시장은 경찰과 소방관들로 둘러싸여서 밤새도록 작업을 이어나갔고 시장 내 조그마하게 만들어진 지원본부와 봉사센터에서는 그들을 위해 식사 및 지원품을 관리했다. 더불어 한편에는 기부를 받는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빵, 우유, 즉석밥, 떡, 핫팩 등 시민들이 기부하고 간 다양한 물품들이 쌓여있었다.



나도 기부할 수 있을까


화재 당일. 시민들의 봉사활동과 구호품이 전달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기업들이나 유명인들의 기부 소식은 들려오지 않을 때다. 여러 경로를 통해서 소방관을 비롯한 화재 진압에 힘쓰는 사람들을 위해 빵과 같은 음식은 전달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과거의 나라면 그저 "멋있는 분들이 많네..." 정도의 생각만 하고 내 할 일을 했을 것 같은데, 이 순간만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나도 뭐라도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이때부터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가만히 생각하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결정했고 실천에 옮겼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전부 다 주세요


빵을 기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사지도 못하지만 이왕 기부하는 김에 프렌차이저보다는 소상공인도 돕는 겸 동네 빵집에서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혼자만의 단골 빵집이 있었는데, 정말 작다 보니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은 아닌 그런 곳이 학교 근처에 있었다. 결심이 너무 늦은 탓에 혹시나 문은 닫지 않았을까 싶어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 달려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쭈뼛쭈뼛 들어가서는 사장님께 말했다.


"여기 있는 것 전부 다 살게요. 포장 좀 부탁드려요."


내가 살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살게요'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참에 내 위시리스트도 하나 달성해 보고자 저렇게 말을 했다. 괜히 스스로 좀 있어 보였다. 빵을 사러 들어가기까지 가격이 얼마나 될지 걱정과 함께 내가 잘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저 말 한마디에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혼자 뿌듯함에 취해서 실실 웃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 빵집에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살게요'라고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내가 한 일은 별 것도 아니었다


곰보빵, 단팥빵, 다양한 도넛 종류들을 포함해 박스 3개였나 4개였나 정도가 포장되었다. 일단 사긴 샀는데 생각보다 무거워서 역시 택시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도 버스를 타고 갈 생각이었다. 타고난 짠돌이 기질은 정말 어디 가지 않는 것 같다. 늦은 시간에 빵을 한 무더기 사다 보니 빵집 사장님이 어디에 가져가냐고 물어보셨고 나는 들어올 때 쭈뼛거리던 모습 그대로 약간 부끄러워하면서 서문시장에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더 포장해 드릴 테니 가져가세요"


깜짝 놀랐다. 사장님도 동참하시겠다는 것이다. 빵집 사장님은 판매대에 올려진 빵 외에 보관되어 있던 다른 빵들과 우유를 더 가지고 나오셨고 함께 포장해 주셨다. 추가한 빵에 대해서 결제를 하려니 돈도 받지 않으셨다. 좋은 일을 하는 거니까 더 가져가라는 거다. 이미 서문시장 화재의 심각성은 대구 시민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함께 걱정해 주셨고 도움을 주셨다. 더불어 어떻게 가져갈 거냐고 묻는 질문에 택시를 타야겠다고 하니, 빵집 앞에까지 나오셔서 택시를 같이 잡아주셨다. 트렁크에도 같이 옮겨주셨다.


끝이 아니다. 택시에 빵과 우유를 잔뜩 싣고는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님께 서문시장으로 가자고 하니 이미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태워보신 것 마냥 구호품 전달하러 가냐고 물어보셨다. 빵집에서처럼 부끄럽게 그렇다고 말하니 가는 길 내내 나 스스로 입에 담기 부끄러운 칭찬을 계속해주셨다. 입꼬리가 씰룩댔지만 아마도 잘 참았다고 생각한다. 뿌듯함도 잠시 금세 서문시장에 도착했다. 택시 기사님도 빵집 사장님과 같이 빵과 우유를 함께 트렁크에서 꺼내어 구호품을 지급하는 장소까지 옮겨 주셨다. 게다가 택시비도 받지 않으셨다!


빵집 사장님의 구호품과 택시 기사님의 지원을 받아 빵과 우유를 잘 전달했다.



내가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나눌 수 있다


굉장히 가난했던 어려운 시절의 나였으면 기부라는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이제 막 돈을 벌기 시작한 어린 대학생이었다면 빵 값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까워서 못했을 거다. 구두쇠인 나는 더 그랬을 거다. 당시의 내가 남을 도와줄 만큼의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면서 조금은 의미 있는 기부를 할 수 기회가 왔기에 비로소 실천으로 옮길 수 있었던 거다. 이로써 나는 내가 더 여유로운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생겼다.


2016년 12월, 그날 있었던 한 번의 기부로 나는 정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수많은 유명인들이나 기업들이 재난과 같은 상황에 기부를 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금액이 얼마든 그 결단은 결코 쉽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부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비난할 수도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행동은 나의 상황과 타인의 힘든 상황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타이밍인 기회가 딱 맞아떨어져야 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여유로울수록 그 기회는 많이 오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내가 여유로울수록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멋있는 어른의 기준


게다가 나의 실천 하나가 불러온 빵집 사장님의 지원과 택시 기사님의 도움 또한 나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다. 나의 기부는 내가 스스로 오랜 시간, 거의 하루를 고민하고 결정해서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기부하는 모습 그 자체를 어여삐 여겨주셨고 즉흥적으로 기부에 동참해 주셨다. 그들은 26살의 나에게 또 하나의 멋있는 어른의 기준이란 것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의 시발점이 나의 작은 행동이었다는데서 더 큰 뿌듯함을 느낀다.




나는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적당한 타이밍에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더 많은 것을 나누기 위해 내가 잘하는 것들을 이용해서 더 여유로운 삶을 유지해야 한다.


아무래도 나는 부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다.



《재테크 03. 내가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 (1) 나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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