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렸을 땐

라누니가 묻는다

by 보부장

언제나 궁금한 것이 많은 우리 둘째 라누니.

틈만 나면 재잘재잘 질문이 쏟아집니다.


"엄마 어릴 땐 뭐가 제일 되고 싶었어?"

"엄마 어릴 땐 뭐가 제일 슬펐어?"

"엄마 어릴 땐 뭐가 제일 기뻤어?"

"엄마 어릴 때 제일 친했던 친구는 이름이 뭐였어? "


그냥 작은 인형처럼 빵긋 빵긋 웃음으로, 깜빡깜빡 눈으로 얘기하던 예쁜 아기였는데.

요즘은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은가 봅니다. 여자아이라 그런 런지, 주변보다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 나이가 되면서 그 나이 때 소녀였을 엄마에 대해서도 궁금해진 건지. 혹은 상하이에서도 한인촌이 아닌 외곽 지역에 생활하는 까닭에 이런 얘기들을 나눌 친구가 없어, 친구 대신 엄마에게 묻는 것 같기도 합니다.


친구가 된 마음으로 대화를 나눠 줘야 하는데 , 질문이 쏟아질 때마다 저는 대답을 찾지 못해 당황하기에 또 바쁩니다. 몇십 년 전 저로 돌아가 추억을 곱씹고 되새겨봐야 새록새록 기억이 날 만할 질문인데,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하필 퇴근 후 가방을 던져두고 세탁물을 꺼내거나 핸드폰으로 급히 채소를 주문하거나, 주부로 해야 할 각종 의무를 해치우는, 먼 훗날 추억에 남을 리 없는 시간대이기 때문 인 듯도 합니다. 이런 질문은 한갓지게 카페에서 태양 바라기를 하거나 나른한 오후에 천천히 걸어도 좋은 산책시간 같은 , 직장맘인 제게 잘 허락되지 않은 그런 시간에 어울리는 질문 아니었나요. 물론 엄마의 어린 날이 궁금한 소녀에게 대화의 분위기까지 파악해서 질문해 달라고 요청하긴 무리겠지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아이들이 잠들고 생활의 의무도 어설프게나 끝난 조용한 시간이 되어서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 가장 기뻤지? 나는 언제 가장 슬펐더라? 내 꿈은 뭐였더라? 나랑 가장 친한 친구는..... 그 아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잠들 때쯤이면 라누니가 제 추억에 던져놓은 질문들로 늘 생각이 많아집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먼 시간은 예닐곱 살쯤. 한 여름, 손가락이 쑥쑥 들어갈 만큼 창살이 얼기설기 하고 시끄러운 선풍기 앞에서 아아아아 제 목소리가 타잔의 목소리로 변하는 것을 들으며 깔깔대는 것도 신이 난 기억이었지요.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에게 술래잡기를 하자며 친구들과 졸라대던 모습도 영화처럼 스쳐갑니다. 분명 그 짧은 10분 동안에도 이것저것 잡무가 많으셨을 텐데 싫다는 내색 한 번 않으시고 제일 먼저 운동장의 세종대왕 동상을 돌아오는 친구가 1등이라며 신나게 우리를 운동장으로 우르르 달리게 하셨던 선생님의 센스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피아노 학원을 다니느라 친구들과 놀 시간이 부족했던 , 저와 이름이 같았던 그 친구는 제가 가장 좋은 친구였을 까요? 피아노 수업을 함께 들을 수 없었던 제게 절대 혼자 집에 가지 말고 학원 거실에서 기다려 달라며, 급하게 피아노를 치고 달려 나오던 친구. 학원 선생님도 그 아이의 엄마도 제게 눈치를 주셨던 것 같은데, 그래도 그 친구와 저는 매일매일이 까르르까르르 너무 즐겁기만 했지요.


어렸을 때 꿈은 좀 많았게요? 대한민국 여덟 살 아이라면 누구나 대통령 한번쯤은 꿈꾸었었지요? 저도 수많은 미래의 대통령 중 한 명이었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나름 소박한 꿈을 동시에 꾸기도 했고요. 그림을 잘 그렸다고 칭찬을 받은 날은 화가가 되었다가, 종이비행기가 잘 날던 날은 과학자도 되었다가.... 중고등 학교 때는 모든 것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대학생"이 되는 것이 유일한 -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의 꿈이었지요. 그러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부터는 금액이 적더라도 월급 따박 따박 나오는 안정적인 회사의 직장인이 되는 것이 또 유일한 꿈으로 바뀌어 있더라고요. 과연 제 꿈은 뭐였을까요?


많은 날, 많은 기억들이 머리를 스쳐 가지만, 제일 기뻤던 기억이라 줄 세울 수 없더군요. 내 어린 시절은 늘 즐거웠고 다행히 떠올리자마자 눈물이 핑 돌만큼 슬픈 일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들을 이렇게 추억하며 살지만, 어느 하루 , 제일 기뻤던 날이랄 것 없이 즐거웠고, 어느 하루 제일 슬펐던 날이랄 것 없이 다 잊어버렸네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흔들리는 사회에도 굳건히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요?

그 무엇도 깊이 새겨 그리워만 하지 않고, 그 무엇도 마음에 담아 슬퍼하지 않던 어린 날의 저에게, 이제 어른이 된 제가 감사합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저는 라누니가 궁금해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 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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