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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하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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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부장 Oct 31. 2022

무엇을 쓸 것인가

무난한 길이었다

대하소설처럼 거창하진 않더라도 뭔가 끄적이기라도 하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돌아본 지난 시간들.




아직 다 살진 않았지만

돌아보니 무난한 삶이었다.


장손 출산의 의무가 무거웠던 아빠의 자리 덕에 아들을 낳기 위한 테스트쯤으로 세상에 태어났지만 내 뒤를 따라 태어난 남동생 또한 딱히 귀한 장손이라고 더 우대받을 것도 없는 가정형편이었던 지라 동생 밥상에 하나 더 놓인 달걀에 눈 흘길 일 없이 자랐고


푸른 잔디밭 위 디딤돌이 예쁘게 놓아진 근사한 양옥집에 살진 못했지만 없는 집 자식이라 어디서 홀대받진 않을까 걱정하신 부모님 덕분에 종종 자판기 커피 대신 찰칵, 캔커피 뚜껑을 딸 수 있었고


유리창이 쨍하게 추운 겨울날 아침, 오늘 하루는 진짜 진짜 학교에 가기 싫어 병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 흔한 설사병, 열병 하나 없이 건강한 12년을 개근상과 함께 졸업했고


초등학교 때부터 남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키, 남들 몸통만 한 다리통 덕분에 동네 무서운 언니 오빠들에게 주머니 한번 털릴 일없이 안전한 사회생활을 보내왔고


늘 고지대에 자리 잡은 덕에 홍수, 태풍 등 철마다 뉴스에 등장하는 수많은 자연재해에도 불구하고 유리창 한 장 깨지는 일없이 뉴스를 보며 아이고 저 집은 어쩌나, 잠깐 품은 딴 집 걱정은 금방 잊은 채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고


나라가 IMF에 빚을 지게 되었다며 당장이라도 세상이 망할 것처럼 시끄럽던 대학생활 끝무렵,  욕심부리지 않은 덕에, (혹은 멀리 보지 못한 탓에) 튼튼한 중소기업에 취업한 훌륭한 자식으로 대학 졸업식에 부모님을 초대할 수 있었고


월급날마다 퇴사를 고민했을 만큼 적은 급여에도 불구하고 돈에 메이는 삶을 살지 않겠다며 절제도 저축도 없는 멋진 신세대인 척 살다가 월급이 통장을 스치다 못해, 마이너스 통장으로 구멍까지 파이게 만들었지만 중국 파견 근무 때 잠깐 주어진 넉넉한 주재비를 모아 빚 없는 경제인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결혼을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것이라며 비혼 주의자 인척 굴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20킬로그램이 넘게 살이 빠진 잠깐 사이, 나의 뚱보시절을 모르는 남편을 만나 결혼에 성공할 수 있었고

(두 아이의 출산을 핑계로 곧바로 이전 체중으로  돌아갔으니 이건 거의 사기결혼이라 봐야 하는가)


인형 뽑기도 아니고, 딸을 낳을 때까지 출산을 감행하겠다는 나 혼자만의  다짐이 하늘에 들렸는지 어쨌는지 듬직한 아들 녀석에 이어 나와 똑 닮은 미니미 딸이 둘째로 태어나 이 어려운 시기에 셋째를 감행하는 모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회사에서 내가 필요 없다 할 때면 내가 필요한 회사가 나타나고, 일이 지겨워 똬리를 비비 틀 때쯤엔 새로운 현장이 나를 불러주고, 사람이 싫어 진저리가 날 때쯤 사람 좋은 사장님이 나를 찾아 주신 덕에 취업 걱정 없이 꾸준히 밥 먹고 살 수 있었고.


너무 무난한 삶이라 내 삶엔 글 거리가 없다.

그렇다고 인생을 뒤흔들 만큼 큰일이 생기거나, 감당 못할 만큼 큰 자연재해나 사고의 피해자가 되고픈 생각은 없다. 그저 심리적으로나 환경으로나 힘든 생활을 소재로 글을 쓰거나 작가의 실제 경험이라는 타이틀로 독자들을 유혹하는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아쉬움이 남을 뿐.







그나저나, 지금 내가 해야  일은 내가   길을  다지고 튼튼히  벽돌을 놓는 일일 텐데.    지나온  눈을 박아둔  길을 걸어가는 것일까. 그러니 똑바로 걷지 못하고 흔들릴 수밖에.

앞으로 내가 걸어온 길은, 그 시간들 사이에 껴있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추억할 때만 돌아보는 걸로. 넘어지지 않고 내 앞에 놓긴 길들을 잘 걸어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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