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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안인사

돌아보는 길

그리고 보이지 않는 길

by 보부장


엄마, 오늘은 회사에서 회의가 있었어요.

이제, 주어진 일만 하기보다는 없는 일을 만들어야 하는 때가 많아요.

내가 이 회사의 대표나 오너가 아니니 부담은 덜 하겠지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해야 하고

숨겨진 기회를 찾아내기도 해야하는 게 내 나이즈음 이 바닥에서 해야 하는 일이예요.


그런데 이제와 웃기는 말이지만 나는 이런 창의적인 일에 어울리지 않은 사람인것 같아요.

새로운 일이나 방향이 생기면 그 화살표를 따라 언제 어떻게 길을 만들지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예요.

일을 한지 25년이 지나가는데 이제서야 그걸 깨달았다니, 정말 어이없는 웃음이 나지만

나이가 든다는 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는 건가봐요.


엄마는 기억할까요?

고3, 진로를 정하고 대학을 결정해야 했을 때, 엄마가 세무대학을 제안했던 일.

당시 엄마에게 처음 들어본 세무대학이라는 곳은 비록 전문대학이지만, 2년제도 아니고 3년동안 말그대로 “전문적으로” 세무학을 배워

졸업을 하면 세무공무원이 되는 안정적인 길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꽤나 공부를 잘 했다고 자부하던 나는 세무대학이 싫다고 엄마에게 화를 냈어요.

그리고는 서울에 있는 대학의 의상학과를 선택해서 지금까지 옷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요.

지금 생각하면, 사실 이 전공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내 성적이면 이 대학 이 전공은 가능하겠지, 패션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아?

난 서울로 갈거야 라는 지방 도시여고생의 막연한 꿈도 몰래 그 결정에 한 표를 던졌겠지요.

무겁고 진지했어야 할 인생의 첫발을 그렇게 철없고 가볍게 시작했어요.



그때 내가 세무대학을 가고 세무공무원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요

법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고, 걷고, 확인하고 그런 일을 더 잘 했을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그 일도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겠지만

적어도 오랜 시간 동안 짜여지고 굳어져 단단해진 틀은 있을테니, 내년에 사람들이 좋아할 칼라가 하늘같은 파란 색일지, 바다 같은 파란 색일지,

혹은 짙은 바다의 짙은 초록파랑일지 점쟁이 처럼 앞을 내다봐야 하는 일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예요.

그리고 건조한 종이와 숫자속에 파묻혀 나이에 따라 따박 따박 연차와 연금을 쌓아가며 살고 있겠죠.


하지만, 파랑이라는 같은 이름 아래 미묘한 색채의 차이로 슬픔도, 희망도 연출 할 수 있다는 칼라의 신비를 몰랐겠고,

손목 위 커프스의 납작한 단추와 둥글고 정갈한 모양의 단추가 만들어내는 마법같은 차이를 알지 못했겠고

눈이 부신 무대위의 모델들에게 내 옷을 입혀보는 감격의 순간도 없었겠지요.


누구나 가보지 않은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지금 걷고 있는 길이 힘들다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늘 뜬구름을 잡아야 할 것 같은 창의 적인 일만 생각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이 저녁

그때 그 엄마의 “세무공무원”이 생각나 가보지 않은 길을 이렇게 걸어보네요.


하루종일 본드 냄새나는 신발 공장에서 삼십대를 보냈지만 종이향 가득한 방에서 책만 보던 교수님처럼 곱게 늙은 우리 엄마는

만일 교수님이었다면 정말 유쾌한 수업을 하셨을거예요

엄마의 가보지 않은 길도 이렇게 상상해 보아요.


나는 지금 내 길을 걷고 있는 걸까요?

아름다운 풍경 속에 묻혀 보이지 않는 내 길을 아직도 찾고 있는 어리석은 저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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