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듬 Dec 02. 2018

초대 받지 않은 손님

학교에서 근무를 하다 보면 교직원을 상대로 영업을 하기 위해 학교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학교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이제 얼굴이 낯이 익을 정도.

4년 동안 학기당 1회 이상은 만나 뵌 듯한, 연세가 족히 아흔은 실 것 같은 인삼 할아버지. 내가 이 학교에 근무하기도 전부터 오래도록 출입을 하셨는지 "아효, 또 오셨네." "아직도 일하시네." 속삭이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판매 품목은 인삼. 선생님들은 상대가 어르신이시다보니 그 누구에게보다 더더욱 조심스레 사양하시는데, 이 분은 얕은 틈을 보이는 선생님들께 은근슬쩍 책상 위에 물건을 놓고 돈을 청구하시기도 하는 꼬장꼬장한 분이다. 초록색에, 광택이 나는 보자기에 싼 물건들을 오른쪽 어깨에 척 걸치고 교무실 문을 여시면 자동으로 '안녕하세요' 인사가 나가면서도 슬쩍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그리고 이리저리 시선을 피하고 바쁜 척을 하다가 곧 별 소득 없이 돌아가시는 뒷모습을 보게 된다. 괜히 죄송스러우면서도, 왜 하필 지금 찾아오셔서 내 맘을 불편하게 하시나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고. 숱이 많지 않은 흰머리와 빼빼 마른 뒷모습을 보며 어릴 적 기억 속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된다. 머릿속도 마음 속도 휘휘 저어 놓고 가시는 분이다.

비슷한 분으로, 도장 할아버지도 계신다. 학기당 한 번은 꼭 오셔서 "도장 만드세요." "어? 눈에 익는데... 나한테 도장 만드셨죠? 문제는 없나요?"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시는 분. 친절히 웃으시며 말을 거는 모습이 친근하시다.


이렇게 연세 드신 분들은 워낙 정기 방문을 하시는 편이라, 어느샌가 안 보이시거나 우리 기억에서 한동안 잊힌다면 신변에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분들께 별 소득이 안 되는 사람이겠지만... 가끔 그 어르신들께서 모두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싼 걸 팔러 오시는 분도 있다. 아버지 뻘의 수제화 판매 아저씨이신데, 발모양을 직접 그리고 그에 맞춰서 신발을 제작해 주신다고 한다. 가격은 삼십만원 가까이 되고.
영업의 시작은 '우리가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는 것. 어느 어느 학교에서 뵙지 않았느냐, 어느 학교의 아무개 선생님 아시냐? 그 분이 이 신발을 엄청 잘 신고 계신다, 등등. 근방의 학교 이름은 다 나온다. 뒤이어 덧붙는 신발의 효능 설명과 개인별 맞춤 건강 체크. 두툼한 발판을 하나 내려놓고서는 선생님들께 그 위에 올라서 허리 쭉 펴고 서 보시라면서 건강 진단을 하신다. 허리가 안 좋고, 다리는 짝다리, 다리는 잘 붓고... 등등의 증상을 척척 짚어내신다. 곁에서 귀동냥하던 몇몇 분들은 솔깃한 듯 반응을 보이신다. 곰곰이 따져보면 웬만한 건 직업병마냥 교사라면 누구나 느끼는 증상들인데도, 무속인에게서 현재의 고민을 간파당한 것마냥 '얼씨구나' 맞장구를 치게 만드는 신발 아저씨의 화법. 그 덕에 어느새 홀린 듯이 발 치수를 재고 있는 선생님이 생기기도 한다.


무엇보다 대학교를 갓 졸업했을 듯한 20~30대의 신용카드 영업사원은 학교의 단골 손님이다. 이 분들은 처음부터 학교만을 타겟으로 한 영업 연수를 받는지 몰라도 대체로 학교 방문 절차를 잘 지키는 편이다.
1) 교감실에 들러 금융 상품 안내를 좀 하겠다고 정중히 양해를 구한다.
2) 행정실에서 방문증을 받아 패용한다.
3) 교무실 문을 열고 바르게 인사를 한다.
4) 어디 소속 누구인지 분명히 밝힌다.


결론적으로 나는 이 분들 때문에 한 해에 신용 카드를 세 개까지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신용 카드를 다양하게 사용해야 할 만큼 지출이 큰 것도 아니며 카드를 모으는 취미도 없을진대 자꾸 카드를 만들게 된다. 그러고선 일 년도 채 안 되어 해지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다 잦은 가입과 탈회로 블랙리스트에 오르는 것은 아니려나 싶기도 하다.


우스울지도 모르지만 카드를 자꾸 만들게 되는 이유인즉슨 영업사원들이 하는, '인정에 호소하는 말하기'를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대구에서 왔습니다." 울산, 부산, 대전, 서울...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영업 사원들은 오는 족족 다른 지역의 말씨를 쓰는, 모두들 정사원이 되고 싶은 인턴이나 수습 사원 신분이며, 원하는 부서에 발령 받고 싶어 타지역에서 신규 가입 **개라는 할당량을 채워야 해 발 동동 구르는 중이라 한다. 일하며 듣는다고 반쯤 흘려 듣다가도, 어린 청춘들의 고생 스토리에 어느샌가 공감적 듣기를 하고 있는 내 모양새가 나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때가 있다. 영업 전략에 말려드는 호구로 보이겠구나 싶어 스스로 우습다가도, 이 분들도 다 살자고 하는 일이다 싶은데 이미 탈탈 털린 내 개인정보 한번 적어주는 게 어려운 일인가 싶은 생각에 미치기도 하고.

게다가 교사 몇 년 했다고 성인이 된 제자들이 있으니, 문득 영업 사원들을 보며 그들이 생각나고는 한다. 어디 나가 일하는 우리 애들도 도움 한번 받았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슬쩍 스칠 때면, 그 날은 카드가 한 장 새로 생기는 날인 셈이다. 우습지만 말이다. 올해는 두 번 만들었는데, 곧 두 카드 모두 나와 이별할 운명이다.


치즈 아주머니, 토마토 아저씨, 복숭아 농장 주인 부부, 녹즙 배달원 아저씨... 수많은 분들이 학교를 오간다. 초대 받지 않은 손님들이라, 바쁠 때는 귀찮기도 하고 거절하기가 참 힘들다. 그럼에도 그들이 먹고 살기 힘든 요즘 고군분투하는 내 주변 사람들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가족이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쓰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냥,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돌부리 하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