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서권 목사님의 글을 읽고
톨스토이는 물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 질문은 깊었고, 치열했고,
그는 실제로 끝까지 내려갔다.
삶의 의미를 붙잡기 위해
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김서권 목사님의 글을 읽으며
나는 한 문장에서 멈췄다.
그는 ‘시작’을 보지 못했다는 말 앞에서였다.
나는 그동안 톨스토이가 믿음의 문 앞까지는 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 앞에 서 있다는 것과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성경은 시작을 이렇게 말한다.
태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었다고.
그것은 단순한 미완의 상태가 아니라 이미 침투한 어둠의 흔적이었다는 해석 앞에서 나는 오래 머물렀다.
인간의 비극은 선악과 사건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던 전쟁이었다는 사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 한 문장이 인간의 사고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는 말이 이상하게도 지금 시대와 겹쳐 보였다.
이름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았다.
힘을 신격화하고,욕망을 정당화하고,
구조화된 폭력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지식은 많아졌는데사람은 더 공허해졌고,
이성은 날카로워졌는데
양심은 점점 무뎌졌다.
그래서일까.
톨스토이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데 답은 계속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김서권 목사님의 글은 그 질문의 방향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가 아니라 “누구 안에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사상도 아니고, 도덕도 아니고, 개혁도 아닌 한 이름. 여자의 후손,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분, 죄와 죽음의 구조를 끊기 위해 오신 분.
그리스도.
인간이 신이 되려다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길이 되셨다는 복음 앞에서
나는 다시 멈췄다.
내가 붙잡고 있던 질문도 사실은 여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부딪힌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더 깊이 내려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시작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사실.
이 글을 읽고 나서
내 질문은 바뀌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나는 누구 안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욕망은 사명이 되고,
상처는 용서로 바뀌며,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닿았다.
아마 이것이 톨스토이가 문 앞에서 멈춘 이유일 것이고, 이 시대가 다시 들어가야 할 유일한 문일 것이다.
태초부터 준비된 해답,
여자의 후손,
예수는 그리스도.
* 덧붙이는 말
이 글은 김서권 목사님의 「톨스토이의 한계」 컬럼을 읽고, 개인적인 묵상과 신앙의 응답으로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