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기술을 배웁니다 05
처음엔 주먹 쥐는 것도, 눈을 치켜뜨는 것도 어색하지만 이것도 점점 익숙해진다. 그리고, 꽤나 즐겁다!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려도 된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까지 느낀다.
이 시간엔 마음껏 주먹을 날려도 돼.
마음껏 째려봐도 돼.
쉭 쉭! 소리 내면서 몸을 비틀어도 돼.
나는 화를 잘 못 내는 사람이다. 오히려 화가 날수록 포커페이스. 얼른 표정을 무표정으로 만들고, 흥분해서 떨리는 목소리는 더 낮게 깐다. 혹은 아예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화가 났다는 걸 상대방에게 들키고 싶지 않거나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최대한 화난 감정을 빨리 반사시켜 버린다.
억울한 감정은 또 어떻고. 할 말 못 해서 억울한 적이 더 많지, 따박따박 따지거나 대들어본 적이 없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착실하게 공부하던 모범생일 때는 물론 고만고만하게 순하고 점잖은 사람들 틈에서 직장 생활을 할 때도, 퇴사 후 심리치유 업계에 10년 넘게 몸 담고 있으면서는 더더욱 그랬다. 마음이 지옥일 때도 미소 짓고, 친절하게 말하고, 타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려는 태도가 몸에 익어버렸다. 부당한 일도 웬만하면 좋게 좋게 넘어가려는 식이다. 불편한 점이 있어도 직접적으로 얘기하기보다 돌려 돌려 예의 바르게 말하는 게 더 익숙하고 편하다. 너무 돌려 말해서 상대방이 알아는 들었을까 싶지만.
그렇다고 화가 없느냐, 그건 아니다. 한때는 '난 화도 잘 안내는 좋은 사람이야.' 자아도취에 빠져있기도 했는데,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나의 분노가 수동 공격성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화가 없는 게 아니라 표현 방식이 다를 뿐 수동적인 공격성 또한 상대방을 얼마든지 숨 막히게 할 수 있다!
공격성 aggression
‘카우프만(Kauffman, 1989)은 공격성의 표출방법에 따라 직접적 공격성, 수동적 공격성, 자기 회피적 공격성으로 분류하였다. 직접적 공격성은 공격성을 표출할 대상에게 직접 언어 또는 신체적 공격 행위를 가하는 것이다. 수동적 공격성은 직접 공격 행위를 하는 것이 두려워서 고집부리기, 무조건 거부하기, 무조건 반대하기, 상대방 무시하기 등의 간접적 행동으로 표출하는 것이다. 자기 회피적 공격성은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이 두려워서 오히려 자신을 때리거나 벽에 부딪치는 등 자해 행동과 같은 가학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격성 [aggression, 攻擊性]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나와 가장 거리가 먼 게 직접적인 공격이다. 신체적 공격은 물론 상대방을 빤히 쏘아보며 화를 내거나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거의 없다.(남편한테만큼은 너무 잘 된다. 미안) 상대방을 직접 대면할 깡도 없거니와 말주변도 없는 데다 화가 욱하고 치밀수록 입술이 얼어붙고 머릿속은 하얘져서 아무 말도 못 한다. 갈등이 생기는 것 자체가 불편해서 그 사람이나 상황을 피해버린다. '아, 이 사람이랑은 안 되겠다. 손절각이네...' 혼자 조용히 마음을 정리한다. 일과 관련되어 있을수록 분노는 더 표현하기 힘들다. 대체로 그냥 참고 넘어가거나, 화난 감정과 무시하는 마음을 티 안나게 꾹꾹 잘 눌러담아 예의바른 이메일을 보내는 것으로 소심한 분노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제대로 가 닿지 않은 분노는 그라데이션으로 점점 더 진하게, 점점 더 거칠게 내 안에서 번지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희미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가슴 한 구석에 똬리를 틀고 터줏대감처럼 남아있는 경우도 있다.
제대로 화 내는 법은 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미트를 치는 두 주먹에 영혼을 실어보기로 다짐한다.
지금껏 살면서 수없이 마주쳤던 분노 유발자들을 떠올리며 '그때 이렇게 말했어야 되는데...' 이불킥 하는 대신.
애꿎은 일기장에만 주절주절 감정을 토해내는 대신.
몸 상하도록 독한 술을 들이붓는 대신.
주먹은 더 묵직하게, 눈빛은 더 예리하게.
지금은 마음껏 공격해도 되는 시간이니까.
지금은 제대로 공격해야 하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