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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숙진 Oct 09. 2021

어머니의 한






어머니의 (흘림체라 읽기 쉽게 옮겨 적음)

   

원수로다. 유교가 원수로다.

나의 평생 그 억울한 가슴 다 녹고 반 등신 되었소.

칠십 당도하니 기다리다 혹시나 만날까 서린 설화 적어놓고 가니 잘 살피십시오.

훈아 삼 남매 혼자 길러 친 외손 팔 종반 학교 보내면 이 금쪽같이 반듯한 모습 혼자 보니 안타깝습니다.

당신도 내 살아 온 것 조금이라도 아실까요.

남 별나게 분산도 하지 않아서 여러 가지로 설움과 훈아 삼 남매 대학 못 보내 평생의 한이 됩니다.

풍산면 집 팔아 서울 가서 아무 계획 없이 어떻게 벌어서 무얼 먹고 살란 것인지.

식량도 되로 받아 냄비 밥 지어 놓으면 만촌 양반 주고 나면 내 밥은 없어도 그만.

어디에 있어 내가 굶는지도 모르고, 그 좋은 공부 하였지.

불시에 달아나며 하는 소리, 집도 두고 아이들 마르보스(기차역)에 데려다 놓고 나가서 풍산으로 가라 하였지요. 불시에 듣는 소리라 일 푼도 없이 어찌 움직이나요?

혼자 살려고 달아나고, 만고 촉수 고초 받고 반병신 되어(전기고문 당했음) 늦게 굴신도 못 하니 분하네요.

서울 집은 샀으면 왜 등기가 없는지요? 집 등기가 있었다면 팔아서 왔으면 집 고생은 덜했지요.

형사가 그 집에 와서 있으면서, 시골 가서 집 등기 찾아오면 돈 주겠다고 하면서 차비 써서 보내주었어요. 그 형사 내 집밥을 여러 번 먹었지요.

풍산 집 팔 적에도 시숙 어른이 이 집 안 팔아 보내면 동생이 죽는다고 하면서, “동생 없는 제수 무엇 하냐?”면서 금방 팔아서 당신께 부쳤다 하니 나는 어리둥절하더이다.

나는 한 푼도 못 써보고 그 고생만 하고 풍산 집터는 다시는 말하기도 싫어 누구에게 물어볼까요.

나중에 오거든 집터나 찾으세요.      

분산은 너 마지기 받아서  고등 겨우 졸업시키고 대학을 못 보내 밭 두 마지기 팔고 논은 서울 와서 조그마한 집 사서 훈아 남매 취직해서 생활하였고, 정훈 대학 입학이라도 시켜볼까 해서 큰집에 밭 한 마지기만 달라고 일 년을 졸라서 홍섭에게 가서 문서 쓰고 도장까지 찍어놓고 일 년을 버티다가 “내 것이지 네가 왜?”하면서 돈 한 푼도 안 주면서, 문서는 본인(큰 동서)이 가진 뜻은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이 바보는 자식 하나 대학 못 보내서 한스럽고 조카들 삼 남매 대학 졸업해서 잘 사는 것 보니 기차(차남)된 것도 한스럽고, 당신네가 있었다면 그럴까 싶네요.

일일이 섭섭하고 이 한을 후생에 가도 풀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문서는 나중에 무슨 말 할지 모르지만, 돈 하나도 안 받은 것은 홍섭이가 증거 댈 겁니다.

남편 못 만나 평생 한도 많고 설움도 많아 후생에 가도 풀릴 것 같지 않아서 대강 적었으니 잘 보십시오. (끝)                              

< 필자의 변 >      

어머니가 칠순때 아버지에게 써 둔 편지(일명 유서)


고향 집은 1940년 초에 필자의 외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집으로 춘양목을 써서 그 당시에는 최고급으로 지어진 기와집이다. 그당시 외가는 안동군 청송군 의성군 세 군 중에 손꼽히는 부잣집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시 세상이 좌우익으로 갈라져 시끄러울때 아버지가 서울 조선어학회에 적을 두고 계시니 백부께서 그 집을 팔아서 서울로 살림 가라고 할 때 어머니가 극구 반대했으나, “동생 없는 제수씨 해서 뭐하나요?” 하며 벌컥 화를 내시며 반강제로 팔았다고 한다.  부잣집에서 자란 어머니는 경제에 대해서 철두철미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여려서 버티지 못하신것 같다.

경북 북부지방의 유교적 문화 때문에도 가족간에 얼굴 붉히지 못한 것이, '원수로다. 유교가 원수로다." 로 첫 소절이 시작된 것 같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빌리지 않더라도, 백부께서는 아우의 처가에서 지어준 집을 볼때마다 열등감이 솟았을까?

 다른 땅이 수두룩한데 하필 사장어른께서 지어 준 집을 팔자고 강요한 것은 사장(査丈)어른께 배은망덕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매수자는 집 자재가 좋고 잘 지어져서 원형 그대로 아랫마을 자기네 터에 옮겨갔다고 한다.

어머니는 평생 살면서 그 집을 볼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쓰라렸을까 생각하니, 가슴을 사금파리로 긁힌 것처럼 따갑다.

집값은 어머니는 만져보지도 못하고 동생에게 다 부쳤다고 하니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집터는 그대로 있는 줄 알았는데 말도 없고 나중에 보니 다른 집이 들어서 있더라고 한다. 필자가 어머니의 이 편지를 보고 고향 집 주소로 확인해보니 다른 사람 이름으로 등재되어 있는데, 언제 누가 팔았는지는 아직 모른다.

이 건을 파헤쳐 보는 것이 내 숙제이지 싶다.

백부님이  팔았는지, 나중에 백모님이 팔았는지 모른다. 아무리 장자상속법이라 하더라도 부친이 물려주신 아우의 집터를 장자라고 아우의 가족과  상의 없이 마음대로 팔았다면 참으로 존경할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나중에 누군가가 팔고 시침을 뗐다면 더욱 용서 못 할 일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모두 별이 되신 지금에서야.


돈으로 해결 할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 땅을 사면 되지만, 어머니의 한은 그것이 아니기에 고민이 더욱 깊다.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고 나니, 다시 백성이 좌우로 갈리어 아수라판이 되었다. 조선어학회도 좌익 우익에 휩쓸려 해체될 지경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툭하면 기관에 붙들려가서 아버지 있는 곳을 말하라고 열 손가락 사이에 전기를 끼워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고통은 어디 있는지 알면 바로 튀어 나올만한 고문이었지만, 어머니도 사실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 몰랐단다. 초죽음이 되면 형사가 집에 데려다 주었고, 형사가 우리 집에 상주하고 있어서 밥해주느라 어머니는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쟁이 터지니, 담당 형사가 아이들 데리고 고향으로 가라고 하면서 차비 써서 기차역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한다. 집을 팔아야 간다니까 등기가 없는데 어떻게 파냐면서, 고향 가서 등기 가져오면 팔아준다고 했단다. 밥을 얻어먹은 정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그도 아버지와 내통한 사이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 카오스 시대에는 누가 아군인지 적인지 몰랐으니까.

아버지에게서도 "집은 그대로 두고 애들 데리고 빨리 고향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다니 어쩔수 없었지 싶다. 그 형사님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 후 아버지는 소식을 모르니, 그 집은 아버지가 팔았는지,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만촌 양반(누군지 모름)이 관여했는지, 그 형사님이 가졌는지 모를일이다. 아마도 바로 전쟁 터지고 피난행렬이 줄을잇고, 폭격이 난무했으니 아버지가 팔지는 못했으리라. 그길로 행방불명 되셨으니.


요즘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남의 일 같지 않다. 전쟁이 나면 집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식량을 구하려고 가구와 보석을 내다 파는 아프간 국민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많다. 우리나라 부자들이 집을 몇 백채나 사들였다는 뉴스를 보면서 전쟁이 나면 저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 코웃음이 난다.

정치권에서는 내가 왕이되면, 반대파를 봉고파직하고  위리안치하겠다고 공공연히 발표한다. 선진국에 진입한 우리나라 정치 수준이 조선시대 당파싸움을 보는것같다.

한국전쟁당시처럼 줄 잘못섰다가, 권력 못잡으면 모두 망명을 가야할 판이다. 좌익우익처럼 둘로 나뉘어 죽이고 죽는 꼴이 재연되는 불상사가 어른거린다.

제발 우리집  역사같은 비극이 생기지않길 기도한다.


어머니는  여러 번 전기 고문을 당하다 반죽음 꼴로 고향으로 내려갔으니, 정신 차릴 수가 없어 서울 집 주소도 기억하지 못한다. 고향에 와서 필자가 태어남으로 산후조리를 외가에 가서 하라고 백부께서 말씀하셔서,  외가에 가서 겨우 몸을 추슬렸다고 한다. 나중에 언니가 전농동 집을 찾아가 보니, 전쟁통에  폐허가 되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더라고 한다.

그때는 언니가 대여섯살 되었을때니 모르는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고향 집도 서울 집도 다 잃어버리고, 친조부께서 문인 묵객들과 한시를 읊조릴 목적으로 지은 정자 ‘종산정사’에서 살게 되었다.

지금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나라에서 관리해 주지만, 청렴을 내세운 멋부림으로 초가삼간으로 지어서 나중에 해마다 지붕 건사하느라 고생하면서 조부님 원망을 많이도 했다.  

 1980년 연좌제가 폐지되기 전까진 내놓고 법적 대응도 할 수 없는 처지고, 번지도 모르니 포기하고 살았는데, 서재 정리하다 발견한 어머니의 유서를 발견하고 새삼 가슴을 치고 어머니의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줄 일이 있을까 하여 꿈틀거려 본다.  

첫번째 한은 늦깎기 공부를 하여 대학 졸업을 했다지만, 서울집은 찾을 도리가없고  고향집터는 알만한 고향 후배가 이름을 올리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찾을방법은 있다지만, 지금 그 땅을 찾아서 뭣에  쓰겠는가.

그러나, 어머니께서 이 유서를 필자에게 맡겼을 때는 다 이유가 있을테니까  고민해 보지 않을수가 없다.

    

어떻게 하는것이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는 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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