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했지만, 비위가 약하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연초에 조던 피터슨 교수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을 읽고, 가능한 한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물론 사소하고 중대한 거짓말을 끊임없이 하고는 있지만 최대한 하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 중이다. 그리고 이 고백도 거짓말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내가 받은 수술은 치질 수술, 정확히는 치열 수술이다. 수술받았다고 하니 다들 물어보는데, 치열 수술입니다.
치열이란?
- 치질 중 한 종류로, 항문선이 찢어져 통증, 출혈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 참고로 치질이란, 항문 내외부에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질환을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 항문을 자꾸 부르기 민망하니, 여기서부터는 반짝이라고 하겠음. 아무 연상도 되지 않는 단어로.
* 치질은 어른들이나 걸리는 건 줄 알았다. 노인성 질환. 그런데 내가 치질이라니, 치질이라니!
생각해보면 난 항상 뭔가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등학교 때부터는 분명히, 항상 피를 쏟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오곤 했는데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지나가고 나면 변기가 피바다가 되곤 했다. (생리와는 다르다, 생리와는!) 워낙 어릴 때부터 늘 봐오던 거라서, 누구나 스트레스받거나 몸이 안 좋으면 가끔 이러고 지내는 줄 알았다.
이 수술의 발단은 쿠바 여행이었다. 1월 30일부터 열흘간, 친구들과 쿠바를 다녀왔다. 여행이 중반을 지나갈 때 나는 약간 미끌거리는, 불운한 느낌을 주는 샐러드를 왕창 먹었었다. (쿠바에서 싱싱한 샐러드를 먹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 친구들은 다들 멀쩡한데 나는 밤낮없이 SS를 해대기 시작했다. 첫날은 뭘 먹고 난 직후 두어 번씩, 두 번째 날은 세네 번. 여행까지 왔는데! 하며 식이 조절을 하지 않았더니 점점 증세는 심해졌고, 구토와 설사가 번갈아 10분에 한 번씩 찾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도 내내 게워냈다.
닷새가 넘게 주르륵주르륵 흘러내리는 통에 몸살을 앓았을 내 그곳은 드디어 피를 보이기 시작했다. 치열은 간단히 말하자면, 반짝이 일부가 찢어져 피가 나는 병이다. 잦은 SS로 그 부분이 계속 자극을 받으면서 찢어진 것 같았다. 피가 나는 거 자체로도 화장실 갈 때마다 징그러운데, 이게 정말 x10000 아프다. 병원 가기 직후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뚝뚝 흐를 정도였다. 나무 위키 피셜, 치열, 치핵, 치루 수술 중 수술 전까지 가장 고통스러운 게 바로 치열이다. “심할 경우엔 쇠로 된 칼날을 항문으로 배출하는 느낌이 들 정도”
화장실 갈 때만 아프더니 갔다 온 후에도 아프고, 큰 일을 보지 않아도 피가 속옷에 묻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서야 병원 갈 생각을 했다. 난 원래 웬만한 아픔은 대충 잘 참는 데다 쿠바 여행 등으로 장기 휴가를 사용한 직후라 수술로 휴가를 또 내야 하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다. 검색 찬스를 사용하니 “심하지 않은 경우 좌욕만 잘해줘도 나아진다”길래 일단 좌욕기를 사봤다. 그렇지만 아픔은 점점 더 심해졌다. 아, 병원에 정말로 가야 했다.
토요일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다. 늦잠을 포기하고 찾은 병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반쯤은 차라리 초기 대장암 비슷한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스물아홉의 젊은 처자가 치질이라니.
치욕의 검사 후 받은 진단명은 당연히, 그냥, 치열이었다. 잠깐. 대충은 예상하실지 모르겠지만, 검사받을 때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야 한다. (검색을 해봤는데도 아무도 나한테 이런 얘기 안 해줬잖아!!!) 의사 선생님이 여성인지 남성인지와 상관이 없을 정도로 아프고 기분이 매우 상한다. 그때 찌푸린 인상이 아직도 안 펴지고 있는 거 같다.
아무튼 검사 결과 수술이 필요했다. 염증이 많이 있는 걸로 보아 상당기간 진행된 만성 치열이라고 하셨다. “괄약근이 좁아 자주 찢어지는 거라서 괄약근 일부를 잘라 항문을 넓히는 수술”을 해야 한다셨다. 척추 마취가 필요하고 1박 2일 입원 필요.
일단 알았다고 했다(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 휴가를 써야 했다. 회사에 휴가 사유를 뭐라고 말하지? 치질이라고??? 생각만 해도 끔찍한 진단명이었다. 최대한 휴가를 덜 쓰기 위해 수술 날짜를 그다음 주 금요일로 잡았다. 그리고 처방받은 약을 받으러 약국에 갔다. 약국에서 약을 이따시만큼 주셨다.
중년의 약사 선생님은 복용약 이외에 연고도 하나 꺼내셨다. 굉장히 친절한 선생님이셨다. “연고가 이렇게 있잖아? 처음 집에 가면 뚜껑을 버려. 그리고 요 꼭지를 끼우는 거야. 그런 다음에 앞으로 한 1센티 이상 넣어서 쭈욱 짜야 돼. 대장과 항문에는 근데 세균이 많단 말이야? 그러면 안 좋은 균이 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소독할 알콜 솜을 같이 조금 사. 그러고 연고를 쓴 후에 항상 소독을...”
와.... 이보다 더 친절할 수 없는 약사 선생님 앞에서 내 기분은 지하를 뚫고 내려가고 있었다. 진짜로 토할 거 같았는데 동시에 진짜 기분이 나빠서 단 게 먹고 싶었다. 약국을 나오자마자 옆에 있는 KFC에 가서 버터맛 비스킷을 먹었다. 먹으면서 나는 수술 후기를 찾아봤다 (비위 킹). 찾아볼수록 최악이었다. 척추마취 부작용 나서 죽다 살아난 신입사원, 괄약근 컷팅 수술 5~6년 만족하고 살았는데 이제 자르지 말걸 후회한다는 후기, 하나도 안 아프다더니 수술 후 일주일을 못 걸어 다녔다는 사람. 여기까지 읽으니 울 것 같았다. 수술까지 6일 남아 있었다.
...
너무 거북해 체하실까 봐, 수술한 날 이야기는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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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당신 옆 사람이 어쩌면 치질 환자일지 모른다. 부끄러워 아무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질병이지만 한국인 약 25~30%, 성인 여성의 40~50%는 크고 작은 치질을 갖고 산다고 한다. 국내 수술 순위 2위가 치핵이다. (1위는 백내장. 치열과 치핵은 다르지만.) 그 정도로 흔한 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