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는 대체 누가 배울까? 대학원에서 한국어 교육을 배우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이었다. 수업을 들을 때는 분명 한국의 대학교 입학하려는 사람(학문 목적 학습자), 한국에서 취업하려는 사람(취업 목적 학습자), 한국 사람과 결혼한 사람(결혼이민자), 한국에서 근무하는 사람(직장인) 등으로 분류했고 학습자별 특성에 맞는 교수법과 교수 내용에 대해 고민한 시간이 길었다.
그런데 연애를 글로만 배운 사람이 어딘가 미숙하듯이, 졸업 후 교육 현장에 나갔을 때의 나는 한국어 교육이 글로 배운 것과는 완벽하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내가 실제 마주한 학생들은 대부분 특별한 ‘목적’이라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왜 한국에까지 와서 배우냐고 물으면 “그냥 한국이 좋아서요.”라고 답하는 게 요즘 대학교 어학당에서 만나는 학생들이다. 나는 그들의 20대다운 무모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로움에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나도 20대 때 저렇게 행동했던가? 나에게 저런 용기는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어쨌거나 이 땅에 발붙이고 산 지 30년이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에 익숙함만 존재하는 나는 작은 것 하나하나에 새로움을 느끼는 학생들을 보며, 덩달아 외국인의 관점으로 한국을 바라볼 때가 있다. K-팝, K-푸드, K-드라마... 이른바 ‘K-문화’가 대체 뭐길래 이토록 많은 학생이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배우고 앉아 있는 걸까. 타이밍을 놓쳐 나는 아직까지 보지 못한 영화 <택시 운전사>에 감명을 받아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던 마카오 학생, 10대 때부터 신화창조 팬클럽 활동을 해서 1세대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아이돌 역사를 꿰고 있는 일본 학생, 한국의 산을 좋아해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명칭의 산을 방방곡곡 등산하고 다니는 스위스 학생을 만날 때면 나는 대체 누가 한국인인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게다가 요즘은 K-뷰티만을 위해 한국을 찾는 학생이 많다. 이번 3주 단기과정 수업에서는 피부과에서 관리를 받으면서 한국어도 배울 겸 왔다는 학생과 퍼스널컬러 진단에 흥미가 생겨서 자세히 배우기 위해 왔다는 학생도 있었다. 기존의 한국어 교육의 학자들이 미처 예상치도 못한 그런 학습자들이 현장에서는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퍼스널컬러 진단을 배우러 온 학생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인데도 남편과 기러기 생활을 결심하면서까지 이곳에 왔다고 한다. 그런 결심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좋아함의 크기는 얼마나 큰 건지 가늠조차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좋아함에는 삶의 정착지를 바꿀 만큼의 특별한 힘이 존재하나 보다.
오늘도 교실에서 학생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눈빛이 반짝반짝하고 얼굴은 어딘가 상기되어 있다. 나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한다. 이렇게 한국을 찾는 사람들만이 지닌 오묘한 에너지가 나에게까지 전달된다. 이따금씩 출근이라는 관성에 젖어 권태로움을 느끼는 내게 정신을 차리라는 말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들의 기대에 상처가 나지 않게끔 최대한 새롭고 재미있는 것들을 찾아 알려주는 게 나의 몫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인 <라틴어 수업>에서 언급한 세네카의 ‘사람은 가르치며 배운다(homines dum docent discunt)’라는 말이 등장한다. 비슷한 말로 ‘교학상장(敎學相長), 줄탁동시(啐啄同時)’가 있다. 나는 이 모든 말을 좋아한다. 나 또한 학생들에게서 분명 삶의 방향에 대해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꿈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좋아함’을 좇아가는 게 맞다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 푹 잠겨 있는 사람들의 눈빛은 저렇게나 반짝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