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솜씨가 좋다면 요리사, 수학을 잘한다면 회계사, 세상사에 관심이 많다면 기자나 정치인 등 저마다의 재능에 따라 떠오르는 직업이 있다. 그렇다면 외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직업을 꿈꾸게 될까?
단연 ‘통역사’ 혹은 ‘번역가’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외향적이라면 통역사, 내향적이라면 번역가를 선택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진짜일지는 모르겠으나 내향형인 나는 번역가 쪽에 마음이 좀 더 기우는 걸 보니 일리 있는 말인 것 같다.
사실 나도 한때는 번역가를 꿈꾼 적이 있다. 그것도 ‘영상 번역가’, 중국어 자격증으로 입사했던 첫 직장에서도 막상 업무에서 중국어를 많이 쓰지 않는다는 게 퇴사 사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를 미리 보면서 좋아하는 배우의 대사를 번역하는 일은 너무 짜릿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런 삶을 사는 황석희 번역가의 sns를 보며 그의 일상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용기가 차올랐던 어느 날, 마포의 한 학원에서 운영하는 영상번역 수업을 등록했다. 실제 영상 번역가로 활동하시던 강사님이 영상 자막 프로그램인 ATS를 사용하는 방법과 같은 실제 하고 계시는 업무를 면밀하게 전수해주셨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나는 그 수업을 들으며 영상번역 일이 기대와 달리 꽤 고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이유는 우선 자막이 시작되는 지점(배우의 말이 시작될 때)을 찾는 일이 유독 수고스럽게 느껴졌다. 프로그램 사용이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별도의 훈련 과정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제한된 글자 수에 맞게 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중국어는 한자 안에 말을 함축할 수가 있는데, 그걸 한국어로 바꾸자니 말이 자꾸만 길어졌다. 대사에 사자성어라도 한 번 등장하는 날에는 깊은 고뇌에 빠져 과제가 밀리기 일쑤였다. ‘이 사람의 의도를 내가 오역하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더 적절한 문장을 찾아내기 위해 검색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렇게 나는 영상번역 일은 언젠가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 다시 배워보자고 다짐하고 잠시 내려두었다.
그렇지만 가보지 못한 길에는 미련이 남아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통번역사’라는 직업에 환상이 가득하고, 그 직업을 가진 사람을 동경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이 직업에는 항상 ‘AI로 대체될 직업 1순위’라는 꼬리표가 붙었는데, 맛보기 스푼처럼 짧게나마 번역 일을 배워본 나로서는 통번역 일을 인공지능이 완벽히 소화하긴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의 말을 전할 때, 사람이 아닌 기계가 그 마음과 의도를 완전하게 헤아릴 수 있을까? 말 하나를 전달하기 위해서 수백 번을 고뇌하는 훈련을 거친 통번역사를 AI가 대체할 수 있을까? 가벼운 얘기일지라도 분명 검토하는 과정에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또한 사람이 직접 통번역을 해야 ‘말맛’과 ‘글맛’이 사는 것 같다. 대화의 공기 흐름, 대화자들의 이해관계, 글 사이에 함유된 메시지 등에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마음’이 있다. 이 마음을 AI가 전달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벌써부터 어딘가 따뜻함이 사라진 효율과 목적만이 존재하는 회색 빛깔 도시가 그려진다. 언어에는 사람의 마음이 들어있다. 나는 우리의 언어가 오래오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