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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혼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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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라보자 May 03. 2024

홍조인간과 후라이드 치킨

  1박 2일의 워크숍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업무 담당자들끼리 모이는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진행까지 맡게 되었다. 참석자들에게 워크숍이란 이름에 걸맞은 결과를 남겼는지는 모르겠으나, 별다른 사고 없이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줘서 감사하다는 후기를 들으니 나 스스로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아쉬웠던 점을 하나 꼽으라면 예전에 비해 전혀 나아지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람들까지 모여서 자연스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순간 주목받는다라는 생각이 들면 사고가 정지하기 시작한다. 특히 타인 앞에서 발표를 하거나 행사를 진행할 시간이 다가올수록 심장박동은 빨리 뛰고 얼굴은 농도 짙게 붉어진다(나처럼 긴장하거나 감정적으로 흥분했을 경우에 발생하는 안면홍조를 감정홍조라고 부른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아마 10대 때부터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했고, 가능한 대놓고 멍석 깔아주는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이런 나도 취준생 시절에는 면접관들 앞에서 토론도 하고  PT도 했었다. 그때는 고질병이던 안면홍조가 다 치료된 줄 알았는데 회사를 다니며 현실에 안주하다 보니 다시 나의 약점이 스멀스멀 커져갔다.




  나이가 들어가고 직급이 높아짐에 따라 앞으로는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말해야 될 일이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더 이상 이런 나를 방치하지 않기로 했고, 안면홍조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리하여 지난달부터 약을 먹고 레이저 치료를 시작했다. 이번 워크숍은 안면홍조 치료의 중간점거 같은 자리여서 기대를 많이 했다.


  보여줄게 완전히 달라진 나

  보여줄게 훨씬 더 예뻐진 나


  에일리의 노래가사처럼 얼굴색 이 일도 변하지 않을 달라진 내 모습을 생각하며 워크숍을 기대했다.


  행사 당일, 오전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워크숍 시작 직전부터 적색경보 모드 튼이 눌린 것처럼 얼굴이 스으윽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란 인간은 진짜 왜 그러냐…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기억은 참 수치스럽다. 안면홍조를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순간적으로 얼굴을 빨개졌을 때의 기분은 마치 발가벗겨진 것과 같다는 것을.


  수치심과 불편함을 지닌 채 불금을 마무리할 수 없었기에 오늘도 마셔야겠다고 결심했다.


  선천적으로 술을 잘 못 마신다. 한 잔 만 마셔도 이 자리에 있는 술 네가 다 마신 것 같다는 얘기를 자주 들을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다.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신체구조를 갖고 이 세상에 나왔지만, 그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술자리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술을 마셨고 지금의 이런 나까지 이르게 되었다(술은 마시면 는다는 말은 진짜다. 처음에 소주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했던 나는 작정하고 마시면 두 병까지는 마실 때도 있다).


  오늘의 안주는 뭐로 할까


  안면홍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우선 빨간 것은 선택지에서 배제하겠다. 그러면 떡볶이, 낙곱새, 짬뽕 등이 탈락한다. 빨간색이 아닌 안주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후라이드 치킨이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져서 그런지 맥주 한 모금에 치킨 한 입이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한 입 베어 먹은 닭다리의 속살을 보고 있자니 뽀얀 속살이 부러웠다. ‘하얀 피부는 바라지도 않고 얼굴색이나 좀 안 변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 붉어질 때는 전조증상이 항상 있다. 목부터 뭔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다. 그럴 때 속으로 ’ 빨개지지 마!!!’라고 항상 외치지만, 입력오류가 발생한 듯 확연히 붉어지곤 한다.


  마치 후라이드 치킨과 같이 주위 환경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내 갈 길을 가야 하는데 스스로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구르다 보니 이런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 같다. 통닭이라는 게 처음 세상에 등장한 후 급변하는 트렌드에 맞춘 구운치킨, 마라치킨, 김부각치킨 등 다양한 치킨들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종잡을 수 없는 다양한 변수들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후라이드 치킨은 별다른 동요 없이 내 갈 길 간다는 마음으로 치킨시장에서 일정 점유율을 꾸준히 차지하곤 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상황이나, 함께하게 될 사람들이 나에게서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거나, 나 스스로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붉어진 얼굴을 한 채로 서있고 싶진 않다. 그렇다면 후라이드 치킨처럼 꾸준히 내 갈 길  가는 것만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다.


다 먹은 후에 생각이 나서 다른 사이트에서 퍼온 치킨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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