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너무 이른 거 아니니?”
“그래도 사계절 지날 때까지는 만나 봐.”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규란이와 만난 지 한 달이 채 지나기 전에 결혼과 오규란을 접붙였다. 규란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 나와의 연애 사실을 알리며 결혼을 입에 올렸다. 부모 눈에는 치기로 비칠 법했고, 우리도 그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쩌면 우리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서로의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스물여섯 해 넘게 살아왔다. 그에 비하면 만난 시간은 보잘 것 없이 짧았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평생을 서로에게 의지하려 하는 걸까. 보여주지 않은 이면의, 자신과는 영 동떨어진 근원적 이질감이 상대방의 마음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였을까. 아니, 알지만 모른 척 고개를 돌리고 서로가 좋아 보이는 천사적 모습만을 광신도처럼 숭배하려 했던 건 아닐까.
2.
사실 우리가 느낀 운명적 일체감과는 달리, 나와 그녀는 너무나도 다르다. 나는 예민하고 그녀는 느긋하다. 지독한 염세주의와 이에 대한 반발심으로 인해 한시도 발버둥 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강진우라는 남자와, 무한에 가까운 긍정주의로 걱정거리를 떨치고 본능에 자신을 맡기기를 즐기는 오규란이라는 여자는 남극과 북극처럼 정반대편에 서 있는 존재다.
그런데 그녀와 내가 이토록 다르다는 바로 이 점이 우리를 매료시켰다. N극과 S극이 달라붙으려 안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와는 다른 상대방의 모습을 ‘왜 저 따위로 행동하지?’가 아닌 ‘그래, 저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나와 그녀가 사랑을 매개로 달라붙을 수 있었던 에너지다.
우리의 상호작용은 흔히 생각하는 이해와는 전혀 다른 논리 구조를 지닌다. 이해는 상대방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납득하는 행위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서로의 행동에 대한 이유는 캐묻는다. 그 안에 숨겨진 정확한 함의는 말하고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으므로. 그러나 그것을 억지로 납득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저 ‘맞아, 너는 그렇지.’하며 서로를 안고 간다. “나와 너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 상호 보완이 되는 셈 아니야?”하며 웃어넘긴다. 우리가 이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굳이 ‘받아들임’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다.
받아들임이 나로 하여금 그녀를 존중하도록 만들고, 그녀로 하여금 나를 배려하도록 만든다.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렇기에 서로의 등에 기댈 수 있어 좋다는 느낌을 공유하며, 그리고 종종 몸을 돌리고 나란히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기도 하며, 가끔씩 몸을 뒤집어서 서로에게 져 주기도 하며, 그렇게 하나가 되어 간다.
3.
우리의 만남. 그 밑바닥에는 애초부터 서로가 다르고, 다른 서로를 받아들인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스스럼없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었고,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비교적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물론 서로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어디선가 갑자기 솟아난 것은 아니다. 돌이켜 보건대, 만나기 전에 이어진 열여섯 시간의 통화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의 우리는 정말이지 ‘누가 서로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보여주는가?’를 놓고 경쟁하는 사람처럼, 서로를 서로에게 남김없이 토해 냈다. 우리는 그 복잡다단하고 지저분한 그 토사물의 어딘가에서 동질감을 발견했고, 마치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토사물을 조용히 고개 주억거리며 마음속에 집어삼켰다. 왜 그랬는지는 우리도 모른다. 다만 그때는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고, 그렇게 했을 뿐이다.
이렇듯 나와 그녀가 함께 써 내려간 강렬한 운명론, 그 짧은 서사에는 결코 짧지 않은 사연이 숨어 있다.
이러니 우리가 어찌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우리가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글_강진우(feat. 오규란)
그림_오규란
자유기고가 강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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