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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ri Sep 14. 2015

사진지우기

이별이라서 그래

좋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헤어짐의 운을 띄우고 결국 내뱉고 말았다. 내가 비치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고 말거란걸,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망스러움과 사랑의 느낌이 공존하는, 피하고 싶은 눈빛은, 정말이지 다시금 이 관계의 끈을 이어 볼까 하는 미련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더욱 매몰차게, 그사람의 앞에 놓인 의자가 넘어질 정도로, 그사람을 밀어내며 떠나왔다. 그녀가 나와는 더이상 어울리지 않는다는 핑계속엔 그냥 그녀가 지겨워졌다는 본심을 숨기고 있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해야했다. 그렇게 떠나온 그 밤은 그녀를 정리하는 밤이다. 내 스스로도 정말 냉정하고 무섭다고 느낄만큼, 익숙한 절차로 추억을 없애기 시작한다. 여지껏 내가 이별의 순간에 제일 비참하고 불쌍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었지. 하지만 그 어떤 복수심에 내가 상처를 주려고 한건 아니다. 내가 이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에도 항상 난 최선을 다해 그 아픔을 즐겼다. 짓고 있던 마음속의 건물이 모두 불타 재가 되어 폭삭 내려 앉을 때까지. 제일 먼저 핸드폰의 연락처에서 그녀를 지웠다. 그래도 머릿속엔 언제나 익숙했던 숫자 여덞개 정도는 한참 남아 있겠지만. 그리고 핸드폰의 사진을 지웠다. 어차피 셀카로 우리 둘을, 또는 내가 그녀를 찍어 주었기 때문에, 순간의 재미를 위해서, 기록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하나하나 들여다 보지 않고 앨범 통째로 망설임 없이 삭제해 버렸다. 그녀는 아직 그대로 사진을 갖고 있거나, 아니 아직 그럴 정신이 없겠지. 아니야 혹시 몰라. 나에 대한 원망에 내가 일어나 떠나오는 순간 다 지웠는지도. 그렇게 핸드폰 사진을 지웠으니 이젠 컴퓨터에 담아놓은 사진들 차례다. 그런데 참 이상한게 이 사진들은 하나하나씩 다 보게 된다. 내가 직접 눈을 대고 바라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확실히 내 육안으로 보는 모습과는 다르다. 또다른 나의 시선으로, 또다른 눈을 통해서 바라보았던 그녀의 모습엔 나의 그런 시선들이 그대로 묻은채로 남아있더라. 하나의 사각형 안에 담기던 그 순간 그녀를 바라보던 나의 감정과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갇혀 있다. 지금의 내 시선이 그때와 다르다는 사실이 너무 혐오스럽다. 차마 더이상 볼 수가 없어 서둘러 지우려고 해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손틈새로 힐끔힐끔 쳐다보듯 이상한 욕망이 꿈틀거리며 궁금하게 만들고 만다. 그래도 어떻게든 그 괴로움과 아픔을 참아가며 지워나간다.

그 해의 내 사진은 몇장 남지를 않았다. 그녀가 찍어준 한두장의 사진. 물론 그녀의 감정이 담긴 시선으로 돋보이게 된 내 모습이지만 그러한 내 사진 속에서 사랑 받았던 추억을 곱씹는다. 내가 사랑을 주었던 추억은 한장도 남아있지 않다. 새로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위함이었을까. 그녀에 대한 예의는 하나도 따지지 않은 내 이기심을 보게되어 스스로 또 자책하고 만다. 그렇게 그 해의 찰나의 순간들로 이루어진 추억은 초라하게 남겨진 내 독사진 몇장들 뿐이다.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지를 않는다. 그 해에 느꼈던 순간순간의 빛깔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린것 마냥 하나도 생각나지를 않는다. 추억이 아니고 역사만 남아 있다.

우연히, 어쩌다, 그냥 지나가다가, 조금의 자의로 인해, 어딘가에 걸려 있는 그녀의 프로필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선 더 과감히 사진을 지워나갈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 사진에 담긴 의미도 모른채, 나의 감정이 그대로 갇힌 조그마한 사각형을 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걸어놓고 있었다. 단지 내 사진이 그정도의 자랑용 사진이었다.

차라리 지우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난 스스로를 합리화 하며 이별의 이유를 정당화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스무살부터 이렇게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 투성이라 아직도 스무살 같이 철들지 못한 모습으로, 청춘이라 그렇다고 울부짖고 있는 나는, 서른을 맞이하는 또 하나의 어른일 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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