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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에게도 긍지가 있다

우리는 참 열심히 살았어

by 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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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가 다른 집단보다 윤리에 대한 감수성이 좀 더 예민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다. 반만 맞았다. 기자협회보 기사에 인용된 어느 이름 모를 주니어 기자의 말처럼, "다들 받는 월급에 비해 너무 진지하게 사회 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답을 찾으려는" 곳은 맞다. 일반적인 직장인과 비교했을 때 업무 환경이 여러모로 더 자유롭기도 하다. 적어도 싫어하는 상사나 선배와 매일 얼굴을 마주보며 일을 하거나 억지로 밥을 같이 먹으러 나가지 않아도 된다.(단, 회식은 논외다.)


그래 봤자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 나를 자신의 출세를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는 사람에게 이용도 당해 봤고, 일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지쳐서 회사를 하나 둘 떠난 뒤 오래지 않아 그 자리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지는 모습도 너무 많이 봤다. 사내정치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사회 초년생은 어느새 귀를 쫑긋 세우고 사내 동향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됐다. 어딘가에 줄을 서지는 않아도, 적어도 단물만 빨린 뒤 상처를 입는 일은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목소리가 큰 사람들, 인사권과 경영권을 쥔 사람들에게 나는 장기말이고 부품일 뿐이었다.


그러나 부품에게도 부품의 긍지가 있다. 나 하나 없다고 조직이 안 돌아가지는 않지만, 나 같은 나사못 하나, 톱니바퀴 하나가 모여서 조직과 사회를 떠받친다. 그것이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는 일들이, 언론사를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굴러가도록 만드는 최소한의 선과 윤리, 원칙이 된다. 부품 주제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이건 아니잖아요?"라고 낸 목소리가 구습을 밀어내고 새로운 전통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주머니 속의 송곳이 되지 못했다고 슬퍼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 가기 싫다고 일요일 정오부터 괴로워하다가도 때 되면 씻고 이 닦고 누워서 자고 알람 끄고 일어나서 지하철과 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존경받을 만하다. 기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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