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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차전

1. 코로나 팬데믹의 시작

by 삶은계란

5년 전 코로나 팬데믹의 시작.


"엥? 네가? 웹디자인을 한다고?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물고 있던 담배를 툭툭 털어내며 매니저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뜬금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긴 했으니까.


"한번 해보고 싶어서요. 디자인을 했으니 살릴 수 있을까 싶어서.."

목소리는 기어가고 있었지만, 확신은 있었다.


"그래. 너의 선택이니 말리진 않겠다만.."

매니저의 목소리에서는 불확실함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내가 많이 무서워했던 매니저였다.

예민하고 섬세한 감각.

고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카리스마.

무서웠지만 닮기도 많이 닮고 싶었던 사람.

이제야 정이 들었나 싶었다가도, 다시 꾀병이 도진건지 그 무서운 표정 앞에 그만두겠다고 말해버렸다.


"근데 많이 어려울 거야. 우리 누나도 웹에이전시를 하는데..."


사실 그 뒤의 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를 겪어본 사람이라 어느 정도 걱정해 주는 말이였겠지만,

자격지심 때문인지 '네가 할 수 있겠어?'라는 말로만 들려 그 단어에만 한동안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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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어서 오세요 xx 매장입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찾으시는 거 있으실까요?!"

"아... 네... 천천히 둘러볼게요.."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 불편하다는 기색을 내비치며 애써 눈웃음 짓는다.

나는 그것이 무언의 '구경만 하고 갈게요'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뒤로 물러섰다.


내 불편한 친절이 부담스러웠는지 나가며 살짝 고개 인사하는 그녀를 보내고

천천히 발걸음을 매장 중앙에 우두커니 섰다.



툭툭. 매니저가 어깨를 두드린다.


"후... 오늘 손님 더럽게도 없네.. 나 식사 갔다 온다"

"네 바쁘면 연락드릴게요 천천히 드시고 오세요"


애써 웃음 짓는 그의 미소엔 그가 쓴 마스크보다 더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답답함.


코로나라고 했나, 숨만 쉬어도 옮는 단다.

매출보다 더 심한 건 사람들과의 거리감,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 대단한 유행병이 돌고 나서 손님이 뚝 끊겼다.

그나마 오는 손님들도 비닐장갑을 끼고 온몸을 칭칭 감고 온 단골손님들.

뭘 접근하려야 접근할 수가 없다.



따닥. 따닥. 따닥.


발을 조여매는 가죽신발의 무게가 오늘따라 더 족쇄 같다.


한 바퀴 매장을 돌며 옷가지를 정리하고 다시 매장 중앙.

마네킹처럼 축 늘어진 내 모습을 확인하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왜 이렇게 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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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매장에서 일하게 된 건 1년 3개월쯤 전이였다.

이직한 목표는 백화점에서 근무 후 '면세점'으로 커리어 전환을 하는 것이었고, 성향상 명품샵보다는 준명품의 올플레이어 그라운드가 잘 맞아 이 매장을 선택했다.

티오만 가능하면 이 브랜드의 면세매장이 몇 군데 있어, 여기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해 보고 면세매장으로 전환을 신청하려했다.

이 매장의 한국인보다 많이 오는 중국인 손님들은 내 숨겨온 매출 욕심과 미래의 희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시간을 쪼개가며 목표했던 중국어 자격증도 얼추 완성되어갔다.

그렇게 또다른 목표의 고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다.


하루에 몇백 몇천만 원씩 매출을 내느라 무거운 족쇄신발도 헤르메스의 샌들 같았는데,

손님의 발길이 끊긴 매장은 족쇄의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한 짝에 1킬로씩은 되는 거 같은데, 오늘따라 그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코로나가 터진후 한 두 달 지나다 보니, '이건 아닌데'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의 '목표'를 도와주지 않는 '상황'은 비교적 장기전이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명품 면세점 문들도 하나둘씩 닫기 시작했고, 그 여파는 이 브랜드에 연계된 면세점까지 미쳤다.

우리 매장의 면세점들이 닫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내 마지막 목표는 희끄므레해져 가는 것 같았다.


그러한 이유로 긴 시간 하루 종일 매장만 거닐며 걷고 생각했다.

그 시기 나는 생각하고 상상만 하는 날들이 많았고, 그 모습이 소크라테스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나에 대한 고민을 할 기회가 생겼다.

그 생각들 중 대다수는 이 상황에 대해 '왜?' 보다 '어떻게?'가 차지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지?'

'그래서 나는 이 일 말고 뭘 잘할 수 있지?'


막상 떠올려보니 나는 재주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마음먹으면 어디서든 2등은 꼭 해야 한다는 욕심은 있었지만, 그것도 정해진 자리 나름이라.

우물 안 개구리가 편해서 정해놓은 그 자리에서 정해진 2등까지만 힘을 썼다.


매번 탁월하지는 않은 나지만, 그렇지만... 미래를 위해선 이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찾아야 했다.


사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어릴 적 미술을 잘한다는 능력 하나 그거 하나 인정받은 기억 밖엔.


디자인. 그래 디자인을 해야겠다.

웹디자인. 요즘엔 웹, 앱을 많이 사용하니까 배워보자.

3~4년 전 인턴 생활할 때 웹디자인팀 소속 분들이 일하는 게 편안하고 행복해 보였었는데 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디자인이라는 거, 대학을 제외하고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게 막연한 자신감인줄 그때는 몰랐다.

한편으로는 이런 막연한 자신감도 재능이라는 것을, 참 늦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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