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접했지만 운수대통, 절박했던 나의 취업 이야기
대학은 온실, 취업은 현실, 내 미래는 불확실!
십여 년 전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오늘따라 기온이 뚝 떨어진 가을 날씨에 스산하게 차가운 가을바람을 맞고 앉아 있자니 문득 그때가 떠올랐다. 졸업을 앞두고 막막해하며 앞으로 뭐 먹고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가을바람만큼이나 스산하던 그때의 내 심정이 말이다.
당시 나는 대학교에서 생명과학/공학(이하 생명과학으로 통일)을 전공하고 있었다. 4학년 졸업반이 되었는데도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진로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대학원을 가자해도 딱히 연구하고 싶은 분야가 없었다 (사실 공부를 잘 못했다). 무엇보다 최소 2년을 실험실에서 꼼짝없이 갇혀 보내야 한다는 게 실로 끔찍했다. 졸업 논문을 쓴답시고 1년간 대학원 실험실에서 생활해 보니 이 길이 내 길이 아니라는 것만 명확해졌다.
사실, 사람들이 말하는 '사회생활'이란 걸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면 취업을 해야 한다.
취업은 더 큰 장벽이었다. 막상 취업전선에 뛰어들고 보니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자격증이라고는 재미로 따 놓은 한자능력시험 2급 밖에 없었다. 토익점수는 물론 없었다. 부랴부랴 학생회에서 주관하는 토익 기초반에 등록했다. 특기사항도 없었다. 휑한 이력서를 채운답시고 쓴다는 게 '증권 FP 자격증 시험 쳐 봤음 (헤~떨어졌어요)' 뭐 이 수준이었다.
'네, 제 전공이 생명과학입니다'라고 소개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서 뭘 배우는데요?"
우리 부모님도 내가 뭘 공부하는지 모르셨듯, 얼핏 듣기에도 뭘 하는 학문인지 감이 잘 안 잡히기 마련이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우리 학교의 경우 유전공학과, 생물학과, 식품공학과가 합쳐져 생명과학부가 탄생했다. 4학년이 되도록 기초과학, 응용과학, 공학 등등 많은 걸 배웠고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다 (아... 등록금). 전공을 살려 취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최소 석사학위는 취득해야 전공분야란 걸 가지고 발이라도 좀 비벼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분야로 취업을 해야 하나? 당최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취직을 하고 싶은 분야도 입사하고 싶은 기업도 딱히 없었다. 취업 두 글자만 들어도 가슴이 답답해지고 자괴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당시 나에게 대학은 온실이었고 취업은 현실이었으며 미래는 불확실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학교에서 열리는 기업 취업설명회란 설명회는 거의 쫓아다녔다. 도대체 취업이란 게 뭔지부터 알아야 했다. 아무리 설명회를 다녀도 저 회사에 지원하고 싶다는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높은 연봉에 혹해서 (돼도 큰 일이라는 생각을 하며) 상반기에 두세 군데 원서를 내 봤을 뿐이었다.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상반기 취업 피크 시즌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다.
어느덧 하반기 취업시즌에 접어들었다. 졸업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 여기다! 그런데 그런데...
하루는 경영관 앞을 지나는 데 이름도 생소한 A 회사의 취업설명회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마침 공강 시간이기도 하고, 취업설명회에 들러 기념품 받는 재미도 쏠쏠하던 터였다 (어떤 회사는 돈이 많은지 백팩 가방을 주더라). 나와 같은 처지의 방황하는 또 다른 영혼에게 연락을 취해 함께 참가하기로 했다
A회사의 취업설명회는 시작부터 남달랐다. 입구 로비에는 당시 잘 나간다는 스모벅스 커피 케이터링 서비스가 준비되어 있었다. 라테와 아메리카노를 마음껏 골라 마실 수 있었다. 다른 때와 달리 무언가 여유롭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영화 시사회에 초대된 사람들처럼 편안한 마음이 되어 준비된 의자에 착석했다. 설명회 분위기 역시 화기애애했다.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인사과 담당자분이 어찌나 설명을 조곤조곤 잘 하는지 귀에 쏙쏙 들어왔다.
A는 세계 4위 규모의 다국적 제약회사로 항암제등 전문의약품만 생산해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했다. 채용분야는 제약영업으로 전공 불문이었다. 신규채용은 영업으로만 뽑는 대신 3년이 지나면 다른 부서로 전환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했다.
아무리 전공 불문이라도 제약회사라니 생명과학 전공과 아주 연관이 없지는 않아 보였다.
'여자들이 일하기 좋은 회사'라며 기업문화를 소개하는 데 무척 솔깃했다. 특히 윤리경영을 어찌나 강조하는지 이 회사라면 세상 어떤 부조리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환상이 생겼다. 복지혜택은 더없이 좋아 보였다. 기본 연봉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여기다!
지금껏 수많은 취업설명회를 다녀봤지만 A처럼 분위기가 좋은 회사는 처음이었다. 친구와 둘이 앉아 여기 지원하자며 흥분하고 있었다. 침착함이 돋보이는 인사담당자는 마지막으로 지원자격 항목들을 화면에 띄웠다. 친구와 나의 흥분이 금세 가라앉았다.
토익 850점 이상
평점이야 교양과목에서 A+를 잔뜩 받아 3.0을 어떻게 넘기긴 했는데 문제는 토익이었다. 취업에 늦게 뛰어든 비슷한 처지의 화학 전공자인 친구와 생명과학 전공자인 나의 토익점수가 지원자격에 미달이었다.
"언니, 나는 간다" 갈 곳 잃은 화학 영혼이 갑자기 갈 곳이 생각난 건지 쿨하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아, 나 저기 가고 싶은데. 참 가고 싶은데. 빵~쁩이 읍네. 생명과학 영혼은 풀이 죽은 채로 의자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생생한 회사 홍보를 위해 현직원들이 대거 단상에 올라 한 마디씩들 했다. 마지막으로 하버드 MBA 출신의 전략기획인지 뭔지 팀의 ㄱ이사라는 분이 마이크를 잡았다. 경영학부를 졸업한 선배라며 '우리 회사 좋은 회사, 많은 지원 요망' 해맑은 메시지를 남겼다.
차분한 인사담당자는 끝까지 차분한 톤으로 "이것으로 A회사 취업 설명회를 마치겠습니다. 회사 직원들이 강당 로비에 있을 테니 지원자분들은 편안하게 하고 싶은 질문이나 이야기를 나누시면 됩니다"라고 마무리를 지었다.
저, 지금 절박합니다
과연 강당을 나서자마자 로비에 회사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질문을 할까 말까 주저주저하다, 질문을 하고 가야 마음이 편안할 것 같았다. 싁 둘러보니 제일 만만해 보이는 젊은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저 직원에게라면 부담 없이 질문할 수 있겠다 싶었다. '저기 질문이 있는데요'하며 슬그머니 다가섰다. 그러자 그 직원은 예상치 못하게 "전략기획팀 ㄱ이사님에게 직접 질문해 보세요" 하며 한발 옆으로 슬쩍 비켜서는 것이었다.
뒤에 서 있던 이사란 분이 갑자기 눈 앞에 등장했다. 사십 대 초반쯤으로 통상의 이사님들보다 젊고 활기차 보였다. 영어식 혀 꼬부랑 발음이 섞인 게 인상적이었다. "어뚼 쥘문 읻숴요 (어떤 질문 있어요)?"
그 짧은 순간 나는 질문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몹시 고민했다. 사실 질문이라고 두 개 준비한 게 좀 창피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계획과 다르게 급작스레 이사란 분을 마주하니 적잖이 부담스러웠다. 왠지 이사라는 직함에는 기업의 비전이 뭔가요, 전략을 필드에 어떻게 적용하실 건가요 같은 거시적인 질문이 어울릴 것 같은데, 당황스러웠다. 기대찬 얼굴로 나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ㄱ이사님을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머뭇머뭇 대다 입을 열고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 질문이란 고작 '저... 그... 나이가 많아도 입사 지원해도 되나요?'였다.
당시 나는 27살이었다. 남자로 치면 군대 갔다 오고 복학하면 딱 맞는 나이였다. 사실 나에겐 전공하고 싶은 분야가 따로 있었다. 그 학과를 목표로 계속 대학입시에 도전했고 어느덧 4 수생이 되어 있었다. 결국 그 해마저 입시에 실패해 얼렁뚱땅 성적 맞추어 입학한 게 지금의 생명과학부였다. 도무지 적성에 맞지 않아 그걸 또 1년 휴학까지 했다. 취업하려고 보니 그만 군필 나이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놔이 솽관업숴요 (나이 상관없어요)" ㄱ이사님의 쿨한 한 마디였다.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두 번째이자 대망의 마지막 질문을 이어갔다. '저... 토익점수가... 850이 안되는데 입사 지원해도 되나요?' 말해 놓고 보니 부끄러웠다.
"아, 줘거 쉰경쑤지 뫄롸요. 쥐원좌들 눠~무 뫄눌까봐 구뤈거에요 (아, 저거 신경쓰지 말아요. 지원자들 너무 많을까봐 그런거에요)."
준비한 두 질문이 모두 끝났다. 처음의 민망함도 잊은 채 나는 어느 때보다 밝고 건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환한 웃음이 절로 지어졌다. ㄱ이사님은 나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주며, 또 궁금한 게 있으면 메일을 보내도 괜찮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A회사에 입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처음으로 마음에 꽂힌 기업이기도 했고 한 편으로 하반기 취업시즌마저 끝나가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메일 같은 건 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절박함이 남달랐다. 바로 다음 날 용기를 내어 ㄱ이사님에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이때만 해도 다소 수준 떨어지는 내용의 사소한 이메일 한 통이 그토록 큰 인상을 남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ㄱ이사님은 약속처럼 정말 답장을 보내왔다. '실은 나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회사 채용과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게 함정. 그런데 내 생각에는 말이에요 어쩌고 저쩌고. 힘내세요' 꼼꼼한 답장이었다.
나는 ㄱ이사님의 격려에 힘입어 입사지원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절박함이 있어서인지 지금껏 작성해본 것 중 가장 진정성 있는 지원서가 탄생했다 (FP 안 적었음은 물론이요).
사소한 메일 하나가 원하는 결과를 낳을 줄이야
평점이 낮은 편에다 토익점수가 기준 미달이어도 서류전형을 당당히 통과했다. 자신감을 얻은 나는 기세를 몰아 2차 필기전형, 3차 그룹토론 및 실무자 면접전형을 통과했다. 5차 신체검사가 남아 있긴 해도 실질적으로 마지막 관문인 4차 임원면접을 코 앞에 남겨 두고 있을 때였다.
한 달이 넘게 진행된 입사전형과 이게 마지막 기회라는 심리적 압박 때문인지 나는 그만 장염에 걸리고 말았다. 처음 며칠 동안 설사거니 하며 방치한 게 잘못이었다. 증상이 점점 심해지고 나서야 병원을 방문했고 장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열흘 이상을 음식 섭취는 물론이고 물조차 함부로 마실 수 없었다.
얼굴은 핼쑥하고 눈은 퀭하고 몰골이 말이 아닌 채로 마지막 면접날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3명이 한 조가 되어 함께 들어가는 면접이었다. 대기실에 도착해 보니 일찌감치 도착한 2명의 남성 지원자가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둘은 두꺼운 사전 분량의 자료 뭉치를 꺼내 들고 제약이 어쩌고, 산업이 저쩌고 대화를 나눠가며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보도 듣도 못한 저런 걸 어디서 구했나 싶어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여전히 속이 좋지 않았다. 뭘 보고 자시고 할 기운도 없어 열공하는 경쟁자들 옆에서 나는 그냥 탁자에 엎드려 있었다.
드디어 나의 이름이 불렸다. 어지러운 정신을 붙잡고 자신만만-열공 지원자들 2명과 함께 면접실로 들어섰다. 거기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나에게 조언의 메일을 보내 주었던 전략기획팀 ㄱ이사님이 세 명의 면접관과 더불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나를 기억하고 못 하고를 떠나 아는 얼굴을 보니 갑자기 마음이 편안해졌다.
중반까지는 세 지원자에게 질문이 골고루 주어졌다. 어느 순간 영어식 혀 꼬부랑 발음이 무척 심한 ㄴ면접관이 나에게 공격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를 못 하고 있었다. 답변을 머뭇머뭇하는 순간 ㄱ이사님이 장난 어린 태도로 툭하고 한 마디 던졌다. "무쑨 췰무뉘 쿠러퀘 어려워요 (무슨 질문이 그렇게 어려워요)? 무쑨 말륀취 나토 몯 아롸 듣켇쒀요 (무슨 말인지 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러자 질문을 했던 ㄴ면접관이 다소 머쓱해하며 누그러진 태도로 나에게 질문을 풀어서 했다. 면접이 무난하게 끝나가고 있었다. 지원자의 마지막 발언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나는 긴장이 많이 누그러졌고 처음과 다르게 오히려 기운도 많이 차린 상태였다. 면접관들에게 실은 지금 열흘째 장염을 앓고 있다며 나의 상태를 솔직히 설명하는 것으로 발언을 시작했다. 긴장이 누그러져서인지 간간이 유머도 구사했다. 네 명의 면접관들이 와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입사하고 싶다는 진심을 담은 발언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약 2주 후 인사과 담당자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합격이었다. 그렇게 나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대, 절박하면 행동하게 되리니
문득 그때를 돌아보면 사소한 이메일 한통이 내가 원하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한 번은 회사 인사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입사설명회 등을 통해 수많은 지원자들을 만나보지만 실제로 이메일을 보내는 등 적극성을 보여주는 이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쑥스럽거나, 다소 귀찮거나, 진짜 도움이 될까 의심도 되고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절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막막했던 순간들이 많았다. 도무지 정보를 구할 수 없는 곳을 여행해야 한다거나, 꼭 타야 할 새벽 버스를 놓쳤다거나, 비자에 허용된 체류기한을 넘겨 버렸다거나, 강도를 당해 가진 돈을 다 잃었다거나, 전 재산을 넣어둔 주머니를 이전 숙소에 두고 떠나버렸다거나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난감한 상황들에 부닥쳤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박한 심정이 되어 종종거리며 방법을 찾아 동분서주하게 되었다. 내가 찾은 방법으로 해결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 소용없을 때가 훨씬 많았다.
신기하게도 그럴 때마다 도움을 주는 이들이 예상치 못한 어딘가에서 꼭 나타나는 것이었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인이 자신의 친구에게 부탁해 숙소를 마련해 주기도 하고, 시간표에도 없던 버스가 정류장에서 대기해 있다거나, 이민국 직원이 앞으로는 체류기한을 넘기지 말라며 문제 삼지 않고 출국 도장을 찍어주기도 하고, 어떻게 어떻게 알게 된 믿을 만한 현지인 친구가 강도당한 나를 돌봐 주었으며, 마침 이전 숙소에서 내가 머물던 곳으로 여행 오는 친구들이 있어 전 재산이 든 주머니를 무사히 건네받기도 했다.
절박했던 순간에는 앞뒤 잴 것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을 기세였다. 창피함도 잊고 쑥스러움도 잊었으며 체면 따윈 거들떠볼 여유가 없었다.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절박함을 느껴보라. 그러면 주저 없이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나는 지금 얼마만큼 절박한가? 나의 절박함을 절박하리만치 느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