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가지 호의보다 한 가지 금기

by 김커선

팟캐스트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 구성애 선생님이 출연한 에피소드를 죄다 찾아 들은 적이 있다. 워낙 유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성교육 강사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시원스러운 화법과 진솔한 태도가 좋았다. 대부분의 강연은 희미해졌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에 관한 구선생님 개인의 경험담이었다.


구성애 선생님은 남편, 아들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마음을 닦겠다고 떠난 길이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걷는 내내 서로에 대한 미움과 불만이 차곡차곡 쌓였다. 선생님은 "한국에 돌아가기만 해 봐라, 이혼 서류부터 접수한다"라고 이를 갈았다.


갈등의 시작은 사소했다. 종일 걷다 식당을 발견하면 선생님은 배가 고파 주문부터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남편은 늘 담배부터 피웠다. 메뉴를 먼저 시키자는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그 짧은 담배 한 대의 휴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남편에게도 불만은 있었다. 인도와 차도가 분명히 나뉜 길에서 선생님은 자꾸만 차도로 올라섰다. 차가 뒤에서 빵빵거려야 인도로 돌아왔다. 위험하다고 말려도 도무지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내의 자유분방함이 남편을 계속 신경 쓰이게 했다.


아들은 더 힘들었다. 하루 종일 걸어 피곤한데, 식당에만 가면 부모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릇 반납부터 이런저런 잔일이 전부 자기 몫이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고 믿는 아들에겐 날이 갈수록 불만이 쌓였다.


그렇게 서로의 신경을 긁던 어느 날, 멀찍이 떨어져 혼자 걷던 길에서 선생님은 야생화를 발견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조용히 피어 있는 꽃. 그제야 그동안 마음이 상해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인생 뭐 있나? 꽃 보듯 남편을 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동안 선생님은, 인간관계에서 정말 중요한 건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임을 깨달았다. 좋아할 만한 걸 열 가지 해줘도, 싫어하는 걸 한 번 해버리면 모든 게 무너진다. 좋아하는 건 안 해줘도 그만이지만, 싫어하는 건 단 한 번으로도 관계의 역린을 건드린다.


이 이야기가 유독 오래 남은 건, 내 삶에도 정확히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 집성촌의 대가족 안에서 자랐다. 집 밖을 나서면 어른들에게 인사하기 바빴고, 집에 오면 성격도, 취향도, 외모도 닮지 않은 5남매 속에서 부대꼈다. 특히 막내인 동생과 나는 매우 달랐는데 나는 꼼꼼했고, 동생은 느긋했다. 나는 질서를 중요하게 여겼고, 동생은 편한 게 먼저였다. 입맛도 정반대인 게 어디 하나 겹치는 구석이 없었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도 신기해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렇게 다른 둘이 가장 오래 붙어살게 된 것이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둘 분가한 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둘만 남았다. 버퍼가 사라지자 전쟁이 시작됐다. 왜 설탕 뚜껑을 제대로 안 닫냐부터 사사건건 시비가 붙었다. 반복되는 습관에 언성이 높아졌고, 동생은 나의 윽박지르는 잔소리에 질색했다.


어느 날은 분노를 주체 못 해 모든 일정을 제치고 부산으로 뛰쳐 내려갔다. 송정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짐했다. "내가 돈만 벌어봐라, 저 인간 얼굴 안 보게 집부터 구해 나간다, 다시는 같이 사나 봐라" 이를 갈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집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변화는 동생이 먼저였다. 동생은 내가 싫어하는, 가령 설거지 후 그릇을 아무렇게 쌓기 같은 걸 피했다. 그 변화에 나 역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지적 대신 농담으로, 명령 대신 제안으로 말투가 달라졌다. 그럴수록 동생은 더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놀랍게도 서로의 변화가 통했다.


지금도 가끔 언쟁은 있지만 돌아서면 끝내고 만다. 우리는 서로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고 그걸 피하는 선에서 관계를 유지한다. 이제는 한 달씩 같이 해외여행을 함께 해도 큰 충돌 없이 지낼 수 있을 정도다.


동생과의 평화를 통해, 나는 십여 년 전 들었던 구성애 선생님의 말을 다시 떠올린다.


인간관계의 기술은 잘해주는 게 아닌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이 단순한 원칙은 사적인 관계는 물론 공적인 관계에도 통한다. 서로 싫어하는 걸 알고 조심하는 것에서부터 관계의 평화가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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