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예의

by 김커선

이십대 초반의 나는 관계 속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걸 처음으로, 그리고 꽤 혹독하게 배운 계기는 첫 연애였다.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짧은 연애가 끝났을 때, 나는 이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처음 알았다. 이별이란 그저 서로 “안녕”을 말하고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의 이별은 달랐다.


한때 가장 친밀했던 사람은, 이제는 인사도 말도 아무 접점도 허락되지 않는 존재로 변했다. 내 세계에서 마치 죽은 사람처럼 처리되었다. 이 감각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영원한 상실’에 가까웠다.


나는 이 생소한 감정을 감당하기 위해 책을 읽고, 상담을 받고, 혼자 생각을 거듭했다. 나름대로 이별 이후의 과정을 처리하려 애쓰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존재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다니던 단과대학은 지하철역에서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 산기슭에 외따로 위치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공부하던 학부 열람실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가 아무 일 없다는 듯 앉아 있기 시작했다. 서로 캠퍼스가 달라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사이였기에 그의 등장이 더더욱 설명되지 않았다. 사라졌어야 마땅할 존재가 다시 나타나자, 그때부터 내 감정은 조금씩 엉키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 이틀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곳에 나타났다.


헤어지자고 먼저 말한 쪽도, 마주쳐도 인사하지 말자고 정리한 것도 그 친구였다. 서로 결이 맞지 않아 갈수록 오해가 쌓였고, 그 오해를 조금이라도 풀어보고 싶었지만 그는 마지막 만남도, 대화도 끝내 거부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아무 설명도 아무 말도 없이 같은 공간에 반복해서 등장하다니. 그는 말을 거는 것도, 그렇다고 피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은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설명되지 않는 행동 앞에서 사람은 끝없이 의미를 만들어낸다. 저게 미련인지, 원망인지, 우연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 그와 대화를 시도할 명분도, 그럴 용기도 나에게는 없었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그 침묵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애쓰는 한, 나는 계속해서 과거에 묶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저 행동은 배려가 아니라 무례다.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방식의 행동이다.' 감정적으로 거친 판단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를 지키는 데는 충분한 이유였다.


나는 그 친구와 얽힌 관계들 역시 칼처럼 정리했다. 공통으로 알던 친구들과도 거리를 두었고, 그의 이름이 나올 가능성 자체를 피했다. 알량한 자존심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감정을 더 소모하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다.


이 소모적인 관계는 일 년이 넘도록 질질 끌어졌다. 행동만 놓고 보면 나는 단호했지만, 마음은 그 시간 내내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과 모호함으로 이어지던 관계는 결국 나를 완전히 질리게 만들었고, 동시에 아쉬움으로 남았다. 만약 깔끔한 이별이었다면, 서로 각자의 방식으로 이별을 소화할 시간을 가졌더라면, 훗날 마주쳤을 때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한 건, 나도 그도 첫 이별을 다룰 만큼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나만의 이별 방식을 확고히 정립했다. 방식은 단순했다. 완전히 지우는 것. 서로의 세계에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출입하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한 이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이 첫 연애를 통해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는 배우지 못했지만, 이별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분명히 배웠다. 이별에는 예의가 필요하다. 질질 끌지 않는 것, 상대를 헷갈리게 하지 않는 것, 말하지 않음으로 감정을 떠넘기지 않는 것.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했다면 내 미련도, 상대의 미련도 머물 자리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침묵이 아니라 명확한 말이 필요하고, 그 말과 어긋나지 않는 더 명확하고 일관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지금의 나라고 해서 감정 표현이 자연스러운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환경에서 자랐고, 굳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 여전히 몸에 배어 있다. 그럼에도 내가 마음을 표현하려고 애쓴다면 이유는 분명하다. 그건 성격 때문이라기보다 의무에 가깝다.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서이고, 상대의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말에 다른 뜻을 숨기지 않는 것, 말한 것이 전부가 되도록 투명하게 전달하는 것. 지금 나는 그게 사람사이에서의 예의라고 믿는다. 여전히 애를 써야만 겨우 도달할 수준에다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별뿐 아니라,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는 결국 이 투명함이란 예의가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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