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부지는 형제, 자매 없이 독자로 자랐다. 8남매, 9남매도 흔하던 시절에 참 흔치 않은 경우였다.
그러니까 아부지가 두 살 때였나, 세 살 때였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홀로 아들을 키웠다. 단출한 두 명의 가족이 이제는 17명의 대가족이 되었으니, 아흔 일곱의 우리 할매는 나중에 할배를 만나도 떳떳하다 했다.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이했지만, 좌익이니 우익이니 이념전쟁으로 나라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남한 정부와 북한 정부 간의 교전도 빈번했다. 학교 체육교사로 일하던 할아버지는 머리도 좋고 배포도 크고 강단이 대단했단다. 할아버지를 눈여겨보던 친척 어르신이 경찰로 이직할 것을 권유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기 2년 전, 할아버지는 북한군과의 교전 중 순직하셨다. 거기가 그... 어디였더라, 대게로 유명한... 그래, 영덕이었다. 할아버지를 고향인 봉화로 운구해 오던 중, 극심한 슬픔에 빠진 할머니는 그만 졸도해 버렸다. 그 나불에 트럭에선가 밖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후 수십년간 할머니는 만성 골반 통증에 시달렸다. 울 엄마가 시집와서 할머니 허리와 골반에 좋다는 약재나 음식을 구해다 무던히도 조약(調藥)을 했다. 어린 시절 집안에 나던 한약 냄새와 햇볕에 바싹 말리던 약 찌끼 소쿠리가 생각난다. 바글바글 끓던 약탕기 옆을 기웃대다 엄마를 도와 빨래 짜듯 탕약을 꾹꾹 비틀어 짜던 기억도 떠오른다.
나는 우리 아부지를 뵐 때마다 참 신기한 점이 두 가지 있다.
먼저 일흔이 넘은 연세에도 어쩜 저렇게 부지런하고 호기심이 넘치고 명랑하실까. 아부지가 늦잠을 자거나 한낮에 방에 드러누워 계신 모습을 본 기억은 손에 꼽는다. 그런 날은 전날 과음했음이 틀림없다. 큰언니네나 오빠네 혹은 서울 집에 들러도 집에만 계시지 않는다. 꼭 어디를 다녀오신다. 첨 보는 사람들이랑 대화도 얼마나 재미있게 나누시는지. 종로 필운동 살 적, 집 근처에 작은 구멍가게가 있었다. 상이군인이라 했던가, 다리를 절뚝이던 점잖은 아저씨가 주인이었는데 아부지는 서울 올 적마다 그곳에서 환담을 나누었다. 그러면 우리도 모르던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를 아부지께 전해 듣곤 했다.
아부지는 책, 신문이나 방송에서 인상적인 걸 발견하면 꼭 스크랩을 해 두거나 기억해 뒀다 얘기해주신다. 고향에 내려갈 적마다 계속 새로운 이야기가 업데이트된다. 아부지들, 특히 경상도 아부지들은 무뚝뚝하다는데 웬걸, 우리 아부지는 밖에서나 집에서나 똑같이 쾌활하시다. 친절하고 우스갯소리 잘하고 또 감정표현에 상당히 솔직하신 편이다. 게다가 상대 이야기도 잘 들어주신다. 덕분에 우리 집 아이들은 각자 의견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서열에 연연치 않고 언로가 보장돼 있다고나 할까.
아부지께 두 번째로 놀라운 점은 5남매를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운동회나 입학식, 졸업식 등 자녀들 행사에 빠진 적이 없었단 거다. 일보다 늘 가족이 우선이었다.
중학생 시절 밤 10시에 도서관을 나서면 항상 아버지가 마중 나와 계셨다. 내 자전거를 아부지 오토바이에 꽁꽁 매달고 ‘마의 오르막 길’을 거슬러 집으로 왔다. 집으로 가는 꼬불꼬불한 산기슭 도로는 경사도 가팔랐지만 가로등이 없어서 어른도 밤늦게 다니길 꺼려했다. 옛적에는 살쾡이도 곧잘 나타나곤 했단다. 아부지는 회식이 있건 중요한 모임이 있건 10시면 어김없이 도서관 정문에서 나를 기다리셨다. 사춘기 시절엔 괜히 짜증도 나고 뭔가 귀찮기도 해서 "안 오셔도 된다"라고 툴툴대기 일쑤였지만 아부지는 늘 한결같았다.
입시철이 다가오면 특히 바쁘셨다. 인터넷 원서 이런 게 없던 시절이라 직접 고등학교, 대학교로 찾아가 원서 내야지, 입학시험 치러 가야지 등등, 뒷바라지는 아부지 몫이었다. 군(郡) 내에는 은행이 없어서 등록금 하나 납부할래도 이웃 도시로 나가야 했다. 교통도 불편해서 서울 한 번 가자면 버스와 기차를 갈아 갈아타고 꼬박 한나절이 걸렸다.
수입이 뻔한 공무원 월급이었다. 아부지는 이십 년이 넘도록 사시사철 오래된 오토바이로 출퇴근하셨다. 한겨울에도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꿋꿋이 오토바이를 타셨다. 등굣길 커다란 아부지 등을 방패 삼아 앉아 있어도 손이 곱고 볼이 빨갛게 얼고 한기가 내복안으로 스며들었다. 동네 어귀가 꽤 멀었는데도 '탈탈탈탈'거리던 아부지 오토바이 소리는 기똥차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부지는 부식값을 아끼려고 점심은 꼭 집에 와서 드셨다. 엄마의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아 밖에서 사 먹을 필요 없다는 듣기 좋은 이유를 대셨다. 한창때 한 달에 쌀 한 가마니씩 해치우는 애들 다섯을 위해 부모님은 농사도 따로 지으셨다. 아부지는 새벽 들일을 끝내고 출근했다가 퇴근 후 다시 깜깜해질 때까지 또 들일을 나가셨다.
하루는 문득, 우리 아부지는 어쩜 소년처럼 명랑하고 늘 가족이 우선 일수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옛날 어르신들 말이, 아비 없이 자란 자식은 됨됨이가 모자라 혼삿길에 지장있다 하지 않았나. 우리 아부지를 보면 그 말은 틀렸다. 아부지는 심성에 별 달리 그늘이 없어 보인다. 엄마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 아부지는 저런 소양을 어디서 배워 안 걸까, 아니면 그냥 타고난 걸까 궁금해질 정도다.
자식을 뒷바라지 한만큼 본전 생각이 나는 게 인간이다. 여태껏 나는 아부지께 잔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늘 내버려 두셨다. 그저 뒤에서 조용히 돈은 안 떨어졌나, 필요한 게 없나 살피실 뿐이었다. 자식 하나가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세상 구경한다며 철 모르고 돌아다니더니 이제는 또 뒤늦게 공부한답시고 결혼이고 돈 벌이고 당최 뒷전이어도 단 한 번도 "결혼해라 어째라" 이야기를 꺼낸 적 없으시니, 난 좀 우리 아부지가 특별히 존경스럽다. 호기심 많고 안전제일 지상주의인 우리 아부지 성향상 연락도 잘 안 되는 자식을 얼마나 걱정하고 궁금해하며 마음 졸이셨을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아무리 당신이 낳고 기른 자식이어도 아부지는 자식들 개개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신다. 내가 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가장 큰 자양분이 되어주신다. 아들은 물론이고 특히 딸들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늘 최고의 예의를 지켜주는 우리 아부지를 보고 있으면 그냥 같은 인간으로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온다.
오늘 아침, 출장 다녀온 언니와 막내와 오래간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수다를 떨며 늦은 아침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갑자기 사이렌이 울려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6월 6일 현충일, 오전 10시였다. 회초밥과 갑오징어 볶음으로 감식을 하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각자 원하는 방향으로 서자며 하나는 동으로 하나는 남으로 낄낄대며 서서 고개를 숙였다. 묵념을 시작한 지 30초나 지났을까. 갑자기 할머니가 생각나고, 아부지도 생각나고 그리고 스물여섯, 한창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도 생각났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뜬금없이 눈물을 보일까 봐 부끄러워 슬그머니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부지는 자식들에게 현충일에 뭘 하라고 당부한 적이 없으셨다. 어릴 때는 할머니, 부모님을 따라 현충일 행사에 종종 참석하곤 했었다. 행사가 끝나면 기념품인 수건을 받아 들고 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는데 달달하니 참 맛있었던 기억이 난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현충일을 특별히 기리지도 할아버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이게 우리 아부지의 교육 방식인 것 같다. '나는 보여줄 테니 너희들이 깨닫는 게 있으면 알아서 하고, 아니면 말아라.'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할머니가 티 없이 잘 키우긴 했지만 또 할아버지 품에서 우리 아부지는 얼마나 더 개구지고 밝고 호기심 많은 아이로 성장했을까. 할아버지의 든든한 뒷바라지까지 받았더라면 아부지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공부도 제법 하고 인물도 훤칠하고 성격마저 호탕하던 젊은 시절의 아부지를 생각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시골에서 꿈 많은 젊은 시절을 보낸 것도 아깝고, 다섯 아이 뒷바라지한다고 아부지 자신을 위한 인생은 살지 못한 것 같아 또 아깝다.
시절이 시절이었던지라 이런저런 상처 없이 지나온 분들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동족끼리 죽고 죽이고, 배곯기도 예사고 참으로 엄혹한 시절이었다. 많은 분들의 희생 덕분에 어쩌면 지금, 한민족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현충일이고 매년 이맘때쯤에 할머니 생신이 있다. 사진으로만 뵌 할아버지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눈매를 생각했다. 대퇴부 골절 수술로 치매 증상이 생겨 이젠 백순의 아기가 되어버린 할머니도 오버랩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줄로만 알았던 우리 아부지를 생각했다. 비록 당신에겐 아버지가 부재했지만 다섯 아이들에게 더없이 훌륭한 아버지가 되어주신 우리 아부지를 생각했다.
귀여운 우리 할매는 3년 전 오른쪽 왼쪽 모두 대퇴부 골절 수술을 받았다. 이후 할머니에게 치매 증상이 생겼다. 원래도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곧잘 하셨는데, 이제는 마치 연극이라도 하듯 대사도 한바탕 풀어놓는다. 그 이야기 대부분의 주제는 할아버지다. 마치 할아버지가 옆에 계신양 대화도 나눈다.
할머니께 밖에 산책 나가자 하면 싫다고 고집부릴 때가 있다. "할매요, 할배가 지금 밖에서 할매 기다리는데?" 하면 할머니는 두말 않고 휠체어에 앉으신다. 밤이 늦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으면 또 할아버지를 들먹인다. 어느 때건 고집 피우는 할머니께 '할아버지'는 만병통치약이자 만능 해결사다. 당신 아드님마저 못 알아볼 때가 부지기수지만 할아버지와 함께한 몇 년의 결혼 생활이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생하고 또렷한가 보다. 우리가 내려갈 적마다 그 시절 에피소드를 들려주신다. 박꽃처럼 환한 웃음을 띄고 소녀처럼 깔깔대며 할아버지 임내(흉내)를 그대로 내신다. 그 단정하던 할머니가 딴소리를 하는 게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 어느 때보다 할아버지랑 가까이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되려 다행이다 싶어진다. 할매는 이제 할배의 사랑을 먹고사는 백순의 아기가 된 것 같다. 칠십여년전 돌도 안 되어 할매 등에 업혀 할배고향 황전으로 온 우리 아부지는 이제 백순의 아기가 일어나면 얼굴 씻기고 옷 갈아 입히고 화장실 출입 봐 드리고 달래고 어르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보살피는 보호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