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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믿는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사실과 거짓 사이의 그 어느 중간쯤

by 안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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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연쇄살인의 경험이 있는 치매환자 '김병수(설경구 분)'는 자신과 같은 광기를 가진 경찰 '민태주(김남길 분)'가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자 그를 협박해 딸을 지키려고 한다. 잊혀 가는 기억 속에 병수가 마주친 민태주는, 태주 자신이 죽인 여성을 트렁크에 싣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잊어버리는 증상 탓에 어려움이 많아 보인다. 이런 그는 자신의 딸이 기록을 위해 사준 녹음기에 두고 절박하게 외친다.


"김병수! 기억해라. 넌 살인자다! 넌 치매환자다! 그리고 넌 지금 살인마 민태주를 잡으러 간다! 민태주 그놈은 연쇄살인범이다! 니 딸 은희가 잡혀있다! 은희는 니 딸이다! 니 딸을 구해내라! 그게 지금 네가 살아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진술에는 거짓이 담겨 있었다. 은희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이 다른 남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기에, 병수는 자신과의 사랑을 배신한 여성을 죽인 뒤 은희도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일어난 우발적인 교통사고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 은희를 자신의 딸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장르의 재미를 돋우기 위해 병수가 저지른 일에 대한 사실과 거짓을 교차로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가 딸의 목을 졸라 딸을 숨지게 하는 장면은 순전한 환상이었고, 안갯속에서 우연히 만난 민태주의 트렁크에 밑에서 채취한 피는 사람의 피가 맞았다는 식이다.


이렇듯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병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는 마치 정상적인 사람처럼 은희에게 말한다. "걱정하지 마라. 너는 내 딸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란다. 그런 정상적으로 잘 살아갈 수 있다." 은희의 목숨을 위협하던 태주를 죽이고, 그 모습을 본 은희에게 그가 한 말이다.


둘의 연기가 팽팽한 긴장감을 일으키면서 폭발적인 시너지를 일으켰다.


은희가 자신의 딸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는데도 태주로부터 은희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던진 셈이다. 아버지에 대한 은희의 남다른 애착이 그의 결정에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병수는 사실과 거짓 그 어느 중간쯤에서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고 싶은 정보를 취사선택했고, 그 선택은 결국 진실이 됐다. 병세가 완연해진 그의 곁을 은희가 끝까지 지키면 서다.


병수의 선택은 치매 환자만 할 수 있었던 선택이 아니었기에, 치매에 걸리지 않은 일반 관객에게 공감을 살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보고 싶은 게 설령 사실이 아니더라도, 약간의 희망 혹은 가능성을 붙여 진실을 만들기도 한다. 병수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죽인 이후 '청소'하듯 악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죽여 왔지만, 그런 그도 삶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를 어디에선가 찾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 무의식이 자신의 딸이 아니었던 은희를 친딸로 받아들이게 한 건 아니었을까.


영화는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원작에서는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조금 더 뚜렷하다고 하는데, 영화를 만든 감독은 이 둘의 구분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영상이 보여주는 상상력의 제약을 극복하도록 했을지 모르겠다. 기억이 흐릿해져 가는 가운데 자신을 찾아온 은희를 누나와 혼동하는 부분은 아빠가 생각나 잠시 먹먹해지기도 했다. 내게 두서없는 말을 하다가도,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괜찮니?" 하고 묻는 걸 보면, 이 질환은 어쩌면 사실과 거짓 어느 중간 사이의 정보를 취사 선택하는 뇌의 결정 방식을 잘 간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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