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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maseve Feb 13. 2024

그.삶.안 III

바실리 칸딘스키: 첫인상

또, 또, 또, 그림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불과 몇 해 전에 다시 해본 MBTI검사에서는 전보다 더 강해진 나의 내향성을 마주했고, 스스로는 때로 버거우리만치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야 사회생활이 가능한 I형 인간임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림 이야기만 나오면 말을 멈추지 못하는 인간. 그것도 소개팅 자리에서 말이다. 아주 난감하다. 잘 보이고 싶은 상대였는데... 

발단은 상대가 클래식 음악 애호가 였다는 점이라고 에둘러본다. 매너가 출중했던 상대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아는 화가 모르는 화가 이름들을 줄줄이 소환하여 장단 맞추느라 진땀 흘렸다는걸 이제야 안다. 덕분에 나는 꺼내지 말았어야 할 그림까지 핸드폰의 사진첩에서 찾아 보여주는 결말을 맞이했다.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짙게 드리워졌다. 

'이게 칸딘스키가 쇤베르크 연주회에 다녀와서 받은 인상을 그린 그림이래요!'

그의 외마디 답변이 선명하게 울렸다.

'오, 쇤베르크!'


인상3, Impression III-Concert 1911

이 그림을 어느 검색창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처음 마주하며, 제목과 부제를 몇번이나 확인하고도 나는 난감했다. 칸딘스키의 대표작들을 먼저 봐왔던 나에게는 어차피 알지 못할 '구성' 작품들이 차라리 더 눈에 익었던 참이었다. 대부분의 추상 작가들이 그러하듯, 그의 초기 작품들도 구상의 형태들 이라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하여 찾아보던 중이었다. 칸딘스키는 역시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 그림에서 콘서트는 무엇이며, 인상에 붙은 3이라는 숫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제라고 붙은 대부분의 작품들에서 감흥을 받지 못하는 나에게는 최악의 작품으로 이름표를 붙일 판이었다. 얼마나 성의가 없었으면 제목까지 무제란 말인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이라면 또 모를까, 그는 최소한 몸을 굴려가며(?) 작품을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제목에서 또 한번 칸딘스키에 낚시질 당한 느낌을 지우지 못한 가운데에서도 며칠간 이 그림의 잔상이 머릿속에서 잊혀지질 않았다. 사실 그 잔상은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될 정도이다, 대체 왜.


쇤베르크의 연주회에 다녀온 인상을 그림으로 그렸다는 글을 확인하고 나서야, 어렴풋이 그 검은색 삼각형이 피아노 인가보다 했다. 그러고보니 그 아래쪽의 형태는 왠지모르게 환호하는 관중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좌측 상단의 어떤 형태는 마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인 것만 같았다. 두눈 뜨고 이게 무슨일인가 싶었다. 설마 내가 칸딘스키의 의도를 따라가는 것인가, 믿을 수 없는 상황인데 그림을 사선으로 접어 절반 가까운 면을 냅다 노란색으로 칠해둔 부분에서 무릎을 탁 칠 수 밖에. 아아- 


오래 두고 봐야할 그림.

정말 성의 없이 단색으로 캔버스를 칠해놓고 전시실에 걸어두는 작품들을 싸잡아 본전 생각나게 하는 그림들이라고 매도해 온 내 입방정을 참으로 반성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의 떠오르는 영감을 주체할 수 없어 무작정 붓을 들었는지도 모른다. 때로는 사회 부조리에 분노하여, 혹은 사무치게 그리운 가족들을 속으로 헤아리는 마음으로, 또 쉴새없이 번뇌하는 '나'라는 인간을 조용히 잠재우려고,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그 마음들이 차고 넘쳐서 캔버스 앞에 섰을 것이다. 쇤베르크를 향한 칸딘스키의 첫인상은 어쩌면 본인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역동적인 힘에 이끌렸고, 그렇다면 그는 정말 잘 그린 그림을 지금의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상대에게 나의 첫인상은 결국 '그림에 미친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뭐, 괜찮다. 칸딘스키의 이 그림이라면 소개팅 10번과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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