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려고 하느라 존재하기를 잊었다.

by 곰고미
이제 우리가 하는 세 번째 일이 있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거나 누군가가 되기를 원한다. 훌륭한 명상가가 되기를 원한다. 졸업생이 되기를 원한다. 우리가 아닌 무언가가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언가가 되려는 것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막는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을 멈추면, 우리가 진정으로 있는 것을 주목할 수 없다. 이 모든 되려는 일은 물론 미래에 있다. 미래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추측이기 때문에, 우리는 꿈의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¹

1. Ayyā Khemā(2014), “Meditating on No-Self: A Dhamma Talk (Edited for Bodhi Leaves)”,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https://www.bps.lk/olib/bl/bl095_Khema_Meditating-on-No-Self.html


Khema는 고통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서는 집착이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맥락에서 ‘무작(無作)’은 애씀 없고 집착 없는 자연스러운 행동을 의미한다. ‘무작상(無作相)’은 움직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특히 Khema는 ‘되고자 하는 욕망’이 현재의 존재 상태를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라는 이원성을 생성한다. 예를 들어, ‘깨달은 나’를 목표로 삼게 되면 필연적으로 ‘깨닫지 못한, 부족한 나’가 전제된다. ‘깨달은 나’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자아는 오히려 그 추구를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더 강화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 상태를 자각하게 되면 그 추구는 자연스럽게 멈추게 된다. 이는 ‘깨달은 나’라는 이상을 상정함으로써 ‘부족한 나’가 생성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알아차리는 나’라거나 ‘자각의 주체’ 또한 실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라고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은 결국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만들어진 자아’이며 ‘임시적인 자아’에 불과하다. 이 자아들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될 수 있는 도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아의 고정된 실체를 부정하고, 임시적 자아의 유연성을 인정하는 것은 불교상담에서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은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는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이원적 분열을 알고 그 이후에 발생하는 희론 작용을 끊는 선문답과 같은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무작의 진정한 의미는 어떤 특정한 상태나 결과를 얻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근본적 진리를 깨닫고, 그 깨달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수행이란 특별한 무언가를 추구하거나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추구와 달성의 욕망을 놓아주는 과정이다. 이는 세간과 출세간, 열반과 윤회라는 이분법적 구분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을 의미한다.²

2. 복주옥. "불교상담을 위한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2025. 서울 pp.58-60.


그러니까 논문은, 나의 역사를 고급스럽게(?) 포장한 고백문이었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 평생을 움직이면서

몸은 여기에 있었지만, 마음은 늘 저기 어딘가에서 방황하느라 늘 분주하고, 불안했던.


몸과 마음의 분열 상태.

몸은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마음은 늘 미래로

혹은 무언가가 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조건과 행위를 후회하는 과거로 돌아다녔다.


늘 '지금'과 '몸과 마음의 일치'를 강조하는 불교를 ‘머리’로 공부해왔구나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경험하는 당혹스러움, 충격과 허탈감을 지나가고 있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깨달은 사람,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온전히 알게 된 사람

깨달음이라고 할만한 것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도 없는 것을 꿰뚫는 앎을 지닌

무언가


산다는 건 괴로움, 불만족을 동반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고 그냥 사는 삶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어려웠던 어린 시절의 서러움과 열등감, 억울함을 보상받고 싶었던 어린아이가 꿈꿨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따라가본 것도 수차례였다.


돈이 부족해서 가족들끼리 여유롭게 밥먹고 놀러갈 시간이 없었으니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열등감을 보상할 수 있는 우월감을 느끼고 싶고

그래서 현재 올라오는 느낌, 감각, 생각들을 짓누르며 ‘잔말 말고 나를 따라와’라고 일방통행하려 했던 그 마음이 꿈꿀 수 있었던 가장 끝판왕이

‘붓다’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궁극’을 꿈꾸고 실현하겠다고 하느라 무시했던 ‘현실’, 지금을 다시 살아내야 하는 것은 결국 몸이었다.


어느샌가 ‘목적지’를 상실하고

달리는 관성으로 계속 달리던 녀석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는 걸 알고. 지쳤다. 언제까지 달려야 하나.


과제를 해치우려는 마음은, 늘 몸을 떠나있었다.

얼마나 긴장하고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지 잘 몰랐다.


일 하고 공부하는 동안은 잔뜩 긴장한 채

몸을 잊고

그동안 참은 숨을 몰아쉬는 느낌으로. 살았음을 계속해서 통과하는 중이다.


퇴근 시간을, 잘 수 있는 시간을,

방학만을 기다리던 마음은,

내가 살아 숨쉬는 시간을 굉장히 협소하게 만들며 결국은

무언가, 무던히도 '되려고' 하느라 존재하기를 잊은 채 살아왔다는 것을. 아프게 통과하고 나니


이제야 조금씩

숨쉬고, 몸을 움직이는 내가. 느껴지고, 경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