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가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온몸이 굳어버렸다.
내 나름대로는 아이를 돕고 싶었던 건데.
선의였는데.
그런데 왜 나는 공격받고 있지.
억울함과 분노와 두려움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바쁜 일정 속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던 와중이었다.
예고 없이 걸려온 날카로운 항의 한 통에, 나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분노와 억울함, 슬픔과 무기력을 지나
상처를 무기로 쓰고 싶은 마음까지 올라오는 걸 다독이며,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고 싶었다.
선의였다는 사실이 내 행동을 자동으로 옳게 만들지는 않았다.
역량 부족이었을 수도 있고,
경계 감각이 흐려진 탓일 수도 있다.
아니, 누구라도 힘들만한 상황이었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반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때의 ‘반응’은 아이만을 향한 게 아니었다.
내 안에서는 더 오래된 장면이 함께 켜졌다.
누가 나를 안심시켜주지 않던 시간.
아무도 내 필요를 알아차리지 못하던 시간.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데 그 걱정에 내 오래된 정서가 섞였다.
운전대를 같이 잡아버린 느낌이었다.
그래서 더 애썼다.
더 설명했다.
더 조심했다.
더 ‘좋은 어른’이 되려고 했다.
그 애씀은 선의였지만,
그 선의 안에는 나의 불안도 함께 들어 있었다.
동일시.
상담 공부를 하면서 귀가 따갑게 들었던 말이다.
아는 것과, 그걸 살아내는 것은 다른 일이다.
막상 아이를 앞에 두고
‘얘 이러면 안 되는데’라는 신호가 켜졌을 때,
나는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나 이렇게 살아서 되게 힘들었고, 지금도 힘든데,
이 아이가 이런 걸 이렇게 그냥 겪게 둔다고?’
이 말은 아이를 향한 말이기도 했다.
동시에, 그 말 안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더 어렵게 만든 건,
내가 어떤 ‘결론’을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끝까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양쪽 모두 자신의 해석에 기반하고 있을 뿐,
지금 여기에서 ‘진실’을 확정해줄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해석된 현실’ 안에서 살아가니까.
다만 이 사건에서 각자에게 돌아갈 배울 몫을 건져가면 좋겠다.
이 스탠스를 나는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각자에게는 ‘자동번역기’가 있다.
그 자동번역기는 각자 고유의 스토리와 맥락을 담고 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다르게 번역되고,
같은 장면을 겪어도 다르게 저장된다.
그러니까 그 번역기가 어떻게 돌아가는가까지
내가 컨트롤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누구의 번역이 ‘정답’이라고 확정해주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번역이 그렇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존중하며
지금의 관계와 생활이 더 무너지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문제는,
사람이 ‘이해’를 ‘확정’으로 바꿔 요구하는 순간에 생긴다.
“그럼 내 말이 틀린 거예요?”
“그럼 내 감정은 무시되는 거예요?”
“그럼 선생님은 우리 편이 아닌 거예요?”
겉으로는 이해를 요청하지만,
실제로는 ‘확정’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내가 ‘확정’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이해받지 못했다’고 느낀다.
바로 그 지점에서 교사는 가장 흔들린다.
나는 그때,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감정은 인정하되,
사실은 확정하지 않는 선을 지키려고 했다.
그게 내 자리였고,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그걸 ‘따뜻하게’ 지키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확정해주지 않으면서도 외면하지 않는 자리.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면서 누구의 감정도 버리지 않는 자리.
나는 자꾸 길어졌다.
감정을 인정하는 말에 이어서
설명과 해석과 맥락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나는 ‘결론’을 내리려 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결론을 내지 않으면서도
누구도 버려지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버려지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커질수록
나는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무의식적으로 과투입했다.
조절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많이 소진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아마 그때부터,
운전대를 잡은 건 ‘교사인 나’만이 아니었다.
내 불안도 함께 잡고 있었고,
그래서 에너지가 더 빠르게 새기 시작했다.
‘아이의 어려움은 아이의 몫’으로 남겨두는 일.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것과
아이가 겪어내야 하는 것을 분리하는 일.
- 그 아이는, 내가 아니다. 그 아이의 속도를 지키기 위해서. -
동일시는 거리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아이의 몫’을 ‘내가 책임져야 할 일’로 착각하게 된다.
머리로는 알았지만,
몸으로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지침을 하나 더 분명히 세우게 됐다.
감정은 인정하되,
사실은 확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로 연결한다.
이 문장은 차갑게 선을 긋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교사가 ‘따뜻함’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경계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그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와 별개로
아이의 몸과 마음에 남은 경험이다.
“네가 그렇게 느꼈구나.”
“그 말이 너를 아프게 했구나.”
이건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다.
반면 ‘사실 확정’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그걸 내가 억지로 메우려 하면
나는 어느새 심판관처럼 굴게 되고,
누군가에게는 ‘편들기’로 읽히기 쉽다.
그래서 나는 ‘해석의 층’을 분리하려고 했다.
사실은 사실대로 두고,
해석은 해석대로 다루기.
그리고 그 다음은,
내가 확정하는 대신
절차와 지원으로 연결하는 것.
“네가 느낀 상처는 가볍게 보지 않아.”
“다만 지금 여기서 무엇이 실제로 있었는지를 내가 확정해줄 수는 없어.”
“대신 너를 돕는 방식으로, 필요한 절차와 지원으로 연결할게.”
이 말은 누군가를 믿지 않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경계였다.
그리고 사실,
이 경계를 지키는 일이 나를 가장 지치게 했다.
같은 문장을 반복해도
누군가에게는 “회피”로,
누군가에게는 “편들기”로 번역될 수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내가 더 잘 말하면 될까?’를 생각했고,
그 질문이 나를 소진시켰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이 지침을 하나 더 추가한다.
‘설명’이 길어질수록
나는 잠깐 멈춘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붙들어야 할 건
사실의 결론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경계와 절차인가?”
그 질문으로 돌아오면
내가 할 일이 다시 선명해진다.
감정은 인정하되,
사실은 확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절차로 연결한다.
이 문장이 나를 지키고,
결국 아이들도 덜 다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