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구공이 내 머리를 정통으로 치면서 공은 땅으로 떨어지고 내 머리를 묶고 있던 자동 머리핀은 하늘을 향해 튕겨 나가면서 포니테일의 내 머리는 확 풀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은
“아싸, 죽었다. 이제 두 명 남았네.”
“공 나한테 패스해.”
“여기로. 이리로 줘.”
나는 아파할 겨를도 없이 내가 공에 맞아 기뻐하는 상대편 아이들 사이로 나와야 했다. 나는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군인 같았다.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나에게 피구는 좀 공포였다. 공을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공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지 못했다. 공은 피해야 되는 무서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우연 치고는 여러 번 나와는 상관없었던 공에 맞아 본 적도 있기에 공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선생님께서 이번 체육시간은 반 대항으로 피구를 한다고 말씀하시면 나는 그때부터 가슴이 쿵쾅거렸다.
‘한 시간을 어떻게 버티지….’
나의 걱정은 복도를 걸어서 운동장으로 가는 내내 한 숨을 불러일으켰다.
운동장에 피구 경기장을 나타내는 하얀 석고 가루가 매직아이로 나에게 다가오곤 했다.
때론 옆 반 아이인 상대편에게
“나 빨리 맞춰줘.”
라고 말하며 경기 초반부에 공에 맞게 해달라고 한 적도 있다. 차라리 공격수만 할 수 있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어차피 공격은 잘하는 남자아이들이 하니까.
그런데 살기 위한 필사적 몸부림!!!
이것은 마음과 몸이 따로 움직이게 했다.
마음은 빨리 공을 맞아서 나가고 싶은데 두 다리는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빠르게 움직였고, 공을 피하는 민첩성은 경이롭게 내 몸안에 장착되어 갔다. 본능이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는 나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시작이었다.
마치 비 사이로 피해 다니는 것처럼 요리조리 피하였고, 때론 나보다 덩치가 큰 아이 뒤에 숨기도 하고, 영화 매트릭스에서 총알을 피하듯 나의 상체를 뒤로 젖히고 본능적인 피하기로 생존을 위한 피하기 기술들을 습득하였다. 상체와 하체, 눈과 귀가 열일을 했다.
같은 편에 남은 아이들이 얼마 없을수록 상대편 아이들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목표물이 정확하고 공의 속도와 강도는 세졌다.
간혹 공에 얼굴을 세게 맞은 아이가 울기도 하였다. 가끔 그 아이가 내가 되기도 했었다.
나는 그 경기장을 사력을 다해 뛰어다니면서 공을 피했다.
사진 출처 다음 카페 2010
이런 나와는 정반대인 콩이(첫째딸 애칭)는 체육을 좋아하고 공을 사랑하는 체육에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아이로 자랐다.
콩이는 초2 때까지는 책만 좋아하는 내향적인 소녀였다.
초등학교 3학년 학기초 콩이 담임선생님과 부모상담을 했었다.
“콩이 어머님, 콩이가 점심시간에 친구들이 나가서 놀자고 해도 교실에 남아 책을 읽습니다. 교실에 남아있는 아이는 콩이밖에 없습니다.”
“아 그런가요? 집에선 활동적으로 잘 노는데… 그럼 선생님, 혹시 콩이에게 추천에 주실만한 방법 있으실까요?”
선생님께서는 태권도 같은 운동을 추천해주셨고, 그렇게 콩이는 태권도를 시작하였다.
도시로 말하면 계획도시처럼 활동적인 콩이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태권도장을 등록했다. 개발하기에 입지가 좋은 도시처럼 콩이의 신체 조건은 운동하기에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선생님의 권유가 아이에게 적중했다.
콩이는 태권도는 물론 태권도 전에 워밍업으로 이루어지는 기초 체력 운동으로 달리기, 줄넘기 등에 재미를 느꼈고, 그럴수록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마치 그동안 움츠려 있던 대근육의 세포가 깨어나듯 아이의 몸에서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밖에 나가서 많이 놀수록 아이가 외향적인 면도 같이 생겼다.
콩이는 금요일에 있는 태권도 자유시간에 피구 하는 것을 유독 좋아했는데 공에 대한 두려움이라곤 1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4학년 어느 날 집에 온 콩이는
“엄마, 친구들이 체육시간에 내가 에이스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공을 피해 다녔던 초등학생이었던 나. 그리고 체육에서 에이스가 되어 있는 콩이.
콩이는 사실 에이스가 품은 아이였다.
(에이스침대 광고가 아닙니다)
2001년 가을의 끝을 알리는 11월.
나의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 그곳은 내가 결혼해서 살 집이었다. 나의 나이보다도 오래된 아파트였다.
나와 지금의 남편은 시간을 내서 우리의 신혼집을 꾸미고 싶었다. 그것의 시작은 오래되어 보이는 방과 화장실의 고동색 문을 페인트로 칠하기로 했다. 총 4개의 문이었지만 쉽지 않았다.
페인트 칠은 페인트가 닿으면 안 되는 부분을 비닐 같은 것으로 미리 정리를 하고, 철저한 준비를 한 다음 하는 것이 페인트 칠하기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몰랐다. 마음만 앞서다 보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팔이 힘들어 왔다.
‘딩동 딩동’
그렇게 몇 시간쯤 지났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화장대, 쇼파, 침대 같은 가구들을 싣고 가구점에서 왔다. 가구들이 하나하나씩 들어와서 신혼집을 채웠다.
나와 남편은 페인트 칠하기 1차를 마치고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어 새로 들어온 쇼파에도 앉았다가 새 침대 에이스에도 누웠다.
“와, 침대 좋은데. 안정감 있고 포근해서 좋다. 그렇지 오빠.”
“좋다 좋아. 이래서 에이스 침대가 좋다고 하는구나.”
우리는 에이스 침대 칭찬을 하며 그곳에 누워서 일어날줄 몰랐다.
에이스 침대는 페인트 칠로 지친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었고, 결혼 앞둔 우리에게 시골집의 아랫목처럼 뜨끈뜨끈한 사랑도 주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그리고 2주 후. 그야말로 결혼식이 코 앞이었던 날.
매달 정확한 날짜에 찾아오던 생리를 하지 않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단 한 번에 그럴까?’
나는 아닐 거야를 되뇌며 퇴근길에 어렵게 산부인과로 발걸음을 했다.
우려는 현실로 콩이를 내가 품은 것이었다.
그 날, 지친 몸을 편안하게 해주었던 그 곳에서.
믿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했다. 에이스 침대에서! 단 한 번에!!!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깜지의 모든맛 2015
에이스침대는 정말 에이스였나!
지친 몸에도 불구하고 포근함으로 피로 풀리게 하더니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단 한 번에 힘차게 헤엄쳐서 온 콩이는 참 에이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