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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을의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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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희 Mar 17. 2020

을의 연애 15

맛있는 거 먹자는 게 잘못인가요

주환이 자취를 시작한 동네는 신림역 근처였다. 8번 출구에서 조금 걷다 보면 나오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네 정거장쯤 더 가야 했다. 복희와 주환 둘에게 신림이라는 동네는 그리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복희는 주환이 이사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네의 맛집이란 맛집은 다 알아냈다. 그녀는 신림에서 새로운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김없이 그날도 복희가 주환의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그녀는 꽤 괜찮은 초밥집을 알아냈다. 그렇게 비싸지 않으면서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주환의 집 바로 근처는 아니었으나 버스를 타면 금방 갈 수 있다.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핸드폰으로 초밥집 리뷰를 보던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카오톡을 켜 주환에게 오늘은 초밥을 먹자고 보냈지만 1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번 정류장은 서림동주민센터 신화 단지 정류장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그녀는 교통카드를 찍고 내렸다. 예상대로 정류장 앞에서 주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익숙하다는 듯 그녀는 전화를 걸었다. 그녀를 반긴 건 그의 목소리가 아닌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롤에 빠져있었다. 복희는 주환의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기분이 상했다. 


집 앞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으나 주환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 그는 복희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며 아주 다급하게 말했다. 대답을 들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노려봤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는 문을 열었다. 짜증이 날 대로 난 복희는 주환에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거냐며 게임에 미친 거냐고 화를 냈다. 그는 그녀의 짜증을 기다렸다는 듯이 왜 오자마자 짜증이냐며 이럴 거면 가버리라고 답했다.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는지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곤 주환을 쳐다봤다. 그는 그녀가 쳐다보든지 말든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복희는 주환이 앉은 의자 등받이를 마주하고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30분이 지나도 한 시간이 지나도 주환은 게임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또 아쉬운 소리는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


"게임 그만하면 안 돼?"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오늘 너네 집에 와서 같이한 게 뭐야? 너 게임하는 거 기다리는 거 말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기다리라니까."

"내가 어떻게 해도 넌 항상 끝까지 게임을 마무리하더라. 절대 중간에 끄는 법이 없어. 참 신기해."


그녀의 말대로 주환은 게임을 끝까지 하고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베개 위에 머리를 댔다. 복희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흘겨봤다. 예전 같았으면 누워있는 주환을 강제로 일으켜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거나 소리를 질렀겠지만 더 이상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복희는 주환에게 가까운 곳에 맛있는 초밥집을 알아냈다며 초밥을 먹자고 말했다. 알았다고 한 그는 너무 피곤하다며 10분만 자고 가자고 대답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주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속한 10분이 지나자마자 복희는 주환을 깨웠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너무 피곤하다며 5분만 더 자겠다고 하곤 한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질 않았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에선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냉정함이 보였다. 그녀는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를 신고는 집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발걸음은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버스에 오른 그녀는 의자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는 창문 밖을 쳐다봤다. 


버스에 내려 처음 가보는 골목을 들어가다 보니 그녀가 찾는 초밥집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간 그녀는 주문을 했다. 먹고 갈 거냐는 사장의 질문에 그녀는 포장하겠다고 답했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도중 복희의 전화가 울렸다. 주환이었다. 


"여보세요."

"어디야?"

"초밥 사러 왔어. 왜?"

"아니 네가 없길래."

"깨워도 안 일어나니까.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돼?"

"초밥 샀어?"

"왜? 너도 먹을 거야?"

"내 것도 사 오면 안 돼?"

"먹지 마. 너 것까지는 사가고 싶지가 않아."

"그래. 알았어."

"응. 내 것만 사갈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같이 먹을 초밥이 들어있는 하얀색 쇼핑백 손잡이를 잡은 그녀는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초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놨다. 자연스럽게 주환도 식탁 앞에 와 앉았다.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며 복희는 네가 먹을 초밥은 없는데 왜 앉냐고 물었다. 머쓱하게 웃던 그는 알았다며 아무것도 손대지 않겠다고 답했다. 진짜 안 먹을 거냐며 쇼핑백에서 그가 먹을 초밥을 꺼내 들었다. 주환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또다시 먹지 않겠다고 답했다. 괘씸한 마음에 그녀도 초밥을 더 이상 권하지 않았으나 주환은 슬금슬금 옆으로 와 초밥을 먹었다. 경멸한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던 그녀는 제발 최소한의 성의 좀 보이라고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는 알았다며 대답만 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희는 그날도 어김없이 주환의 집으로 향했다. 똑같았다. 버스정류장엔 그가 없었으며, 전화를 걸면 그가 아닌 키보드와 마우스 소리가 그녀를 반겼으며, 문을 두드려도 바로 열리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집에선 항상 주환이 게임하는 뒷모습만 보고 있어야 했다. 그는 만족할 만큼 게임을 하고 나면 곧장 이불 위에 있는 베개를 베곤 자거나 핸드폰으로 게임을 또다시 했다.


밥을 먹자는 복희의 말이 침묵을 깼다. 주환은 배가 고팠는지 알겠다며 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밖으로 나온 둘은 버스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조용히 따라오던 주환은 갑자기 복희에게 어딜 가는 거냐며 물었다. 그녀는 신이 난 말투로 닭갈비를 엄청 맛있게 하는 곳이 있다며 그곳으로 가자고 했다. 대충 듣던 주환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버스정류장 앞에 멈춰 서니 그는 짜증 섞인 말투로 그녀에게 또다시 말을 걸었다. 


"설마 버스 타고 가자는 건 아니지?"

"맞는데? 버스 타고 세 정거장이면 가!"

"뭐라고? 무슨 밥을 버스까지 타서 가서 먹어야 돼?"


한숨을 길게 내쉰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후 아무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조금이라도 잘못 말하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누가 봐도 그녀는 화가 난 모습이었으나 주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버스 타고 갈 거면 밥을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네가 하는 게 뭐야? 하는 게 있기는 해? 데이트 코스를 알아보기를 하냐. 우리 동네를 오기를 하냐. 나만 항상 너네 동네까지 오는데 마중도 안 나오고 집에선 매일 게임만 하고 네가 하는 게 도대체 뭐야?"

"나는 정말 이해가 안 가. 무슨 밥을 버스까지 타고 가면서 먹어야 돼?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식당 많잖아?"

"나도 이해가 안 가. 내가 맛있는 거 먹자는 게 잘못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솔직히 네가 문제 아니야? 버스 타기가 귀찮고 싫은 거잖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 대충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잖아? 똑바로 말해. 항상 내가 문제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 진짜 지긋지긋하니까."

"버스 타려면 또 차비 나가잖아. 무슨 밥 하나 먹는데 차비까지 쓰면서 가야 되냐고."

"밥 네가 사니? 네가 사? 네가 나 밥 사준 건 언제야? 있긴 하니? 나는 차비 안 써? 넌 그까짓 몇천 원이 아까워? 너 정말 대단하다. 그래 가지 말자. 이런 기분으로 가서 뭐하냐. 나 그냥 집에 갈게.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서 알아서 사 먹어."


어떻게든 우겨서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던 평소와 달리 그녀는 주환의 말을 받아들였다. 주환과 무언가를 같이하고 싶은 마음에 들뜬 감정으로 제안할 때마다 매번 그는 거절해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만들었다. 좋은 마음으로 같이 하자는 그녀의 의견은 그에겐 항상 귀찮은 일거리 정도였다. 처음엔 거절을 당해도 끝까지 조르거나 우겨서 주환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복희는 그러지 않았다. 조르고 조르던 복희는 거절을 당하면 거절을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더 이상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았다. 거기서도 더 나아가 그와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맛있는 밥을 먹는 것도, 꽃놀이를 가는 것도,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쇼핑을 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 것도 더 이상 복희에겐 주환과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그녀도 그처럼 더 이상 둘의 관계에 있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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