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예능 <더 인플루언서>를 보고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단, 구체적인 게임 결과와 인물명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더 인플루언서>를 보았다. 77명의 인플루언서가 경쟁을 펼쳐 최종 1인의 우승자를 골라내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총 7부작인데 바로 어제 최종화까지 전부 공개됐다. 속칭 관종이라 할만한 이들이 총출동해서 무려 경쟁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제목만 보고도 피로감이 몰려왔지만 호기심에 보기 시작했다. 서바이벌 예능은 인간 본성의 양극단(욕심과 이기심, 희생과 헌신)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면에서 번번이 매력적이다.
참가자들은 모두 전자식 목걸이를 차고 있었는데 화면에는 구독자 또는 팔로워수를 현금으로 환산한 금액이 찍혀있었다. 77개의 목걸이에 적힌 금액을 다 합치면 우승자가 가져가게 될 총상금 3억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메타포 같았다. 그들이 얻고자 온 에너지를 쏟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목을 단단히 옭아맨 것은 대중의 관심이요, 곧 돈이었다.
77명의 인플루언서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순전히 내 기준) 해괴하거나 망측한 의상을 입고 나타나 각자를 뽐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즈음 1라운드 미션이 발표되었다. 좋아요 15개, 싫어요 15개를 다른 참가자들에게 주어야 하며 그 결과에 따라 30명만이 생존한단다.
참가자들은 좋아요를 1대 1 교환하기도 하고 팬심을 드러내며 넙죽 주기도 했다. 높은 금액이 찍힌 인물을 탈락시키기 위해 싫어요를 주거나 패를 나누어 전략적으로 특정인에게 싫어요를 몰아주기도 했다. 얕은 관심과 계산이 난무하는 장면에 지쳐 이제 그만 볼까 할 무렵, 한 유튜버가 눈길을 끌었다. 기획력이 강점인 그는 가만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마이크를 잡고, 반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언사를 함으로써 싫어요를 모으기 시작했다. 인플루언서의 존재감을 평가한다면 싫어요도 좋아요처럼 점수로 인정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물론 그의 예상은 멋지게 들어맞았다.
흥미로웠다. 인플루언서들에게 악플보다 못한 것이 무플이라니. 좋든 나쁘든 관심을 끌어야 일단 생존할 수 있었다. 대중이 무엇에 현혹되는지, 무엇을 궁금해하고 어디를 건드려야 분노하는지 경험으로 터득한 베테랑들이 2라운드, 3라운드를 버텨내며 생존해 나갔다. 라이브 방송의 시청자수로 겨루는 2라운드와 사진에 눈길이 머무는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3라운드에서는 내내 어그로가 범람했다.
중대발표를 한다고 공표하고 시청자를 붙잡고 있거나 자극적인 멘트로 시선을 끌었다. 신체 특정 부위를 노골적으로 클로즈업한 사진과 거짓말에 가까운 텍스트들은 탈락을 면하게 해 주었다. 어그로를 끄는 방식이 잘 먹힌다는 게 놀랍다가 어느 순간 조금 불쾌해졌다. 대중의 관심을 받는 법이 고작 이런 것이라니. 언젠가 어느 공직자가 대중을 개돼지에 비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꼈던 모욕감과 조금 닮아있는 불쾌감이었다.
블랙코미디 같기도 했다. 대놓고 판을 깔아주고 돈과 바꿀 수 있는 관심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이들의 재롱을 보는 일이 마치 드라마 오징어게임이나 더 에이트 쇼의 설정 같았다. 그러니까 나는 극 중 부자 관객이 된 셈이었다. 나 같은 시청자가 없다면 넷플릭스는 막대한 제작비에 상금까지 쥐어주며 그들을 끌어모으지 않았을 테니 나를 위해 준비된 잔치가 분명했다. 하지만 마냥 유쾌한 잔치일 수는 없었던 것이 그것은 쇼가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었다.
돈과 관심을 좇는 인플루언서들이 만들어내는 콘텐츠들은 오락거리로만 소비되고 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유행과 트렌드를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대중의 지갑을 열게 하고 시간을 지배하고 알게 모르게 가치판단에, 의사결정에, 문제해결방식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방송을 틀어놓은 채 몇몇 인물들을 검색했다. 유명인과 미국 한복판에서 나란히 사진이 찍혀 논란의 중심에 선 BJ가 있는가 하면 촬영 당시 2백만이 넘는 구독자를 가진 대형 유튜버였으나 현재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참가자도 있었다. 대부분의 출연자들에게 넷플릭스 예능 출연 이력은 내세울만한 커리어로 남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인플루언서라는 존재에 대해, 그 자격에 대해 물음표를 품게 되었고 내 시간과 관심을 주는 일에 까다로워지는 방식으로 그 영향력을 통제해볼까 한다.
3라운드에서 모두가 어그로성 사진을 찍고 있을 때 미학적인 퀄리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던 유튜버가 있었다. 2라운드 라이브 방송에서는 본인에게 의리를 지키려 방송을 끄지 못하던 구독자들에 고마워하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가식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로 불리는 실력을 가졌고 잡음 없이 탄탄하게 수년째 명성을 이어온 인물이었다. 대중을 얕잡아보지 않았던 그는 파이널 라운드까지 살아남았고 우승 여부와 상관없이 이 방송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사는 모습이 변했다 한들 클래식은 녹슬지 않는가 보다. 사람에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언제나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진심, 진실, 성실, 정직 같은 것들. 승승장구하던 대한민국 최강의 2백만 유튜버를 단숨에 몰락시킨 원인이 탐욕과 거짓말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인플루언서들의 세계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듯하다. (20240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