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에서
아까는 무척 화가 났다. 수영장에서였다. 수영을 마치고 나와 샤워장에 줄을 서 있는데 두 사람이 대놓고 새치기를 하는 게 아닌가. 노년에 해당될 두 사람은 저 여기 줄 서 있는데요 라는 나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를 향해 눈을 찡긋(아마도 한 번만 양해해 달라는 의미일까)하더니 구역 내 샤워 중인 10명 중 진도가 빠른 쪽에 바짝 섰다.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의 고민시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3단 고음으로 "아줌니이이이!!!"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나마 나의 분노를 사그라들게 해 준 것은 내 뒤로 줄을 선 아주머니 둘의 대화였다. 목소리로 미루어 짐작컨대 새치기를 한 당사자들과 동년배일 것 같았다. 둘은 사람들이 질서를 너무 안 지킨다는 한탄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다들 좀 들으라는 듯 큰 소리였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동조의 물개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낯짝이 조금만 더 두꺼웠다면 뒤를 돌아 그들과 눈을 맞추고 맞장구를 쳤을 텐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든든한 위안이 된다
3대 1 수영강습은 7월 한 달로 끝났지만, 8월, 9월에도 꾸준히 수영을 하러 다닌다. 집에서 도보 20분 거리에 구립수영장이 있다. 단체 강습은 워낙 수강 경쟁이 치열한 탓에 끼지 못했고 12시에 시작하는 자유수영 시간을 이용해서 오로지 자유형만을 반복 연습하는 중이다. 타고난 운동능력이 저급한데도 꾸준히 하니까 실력이 는다. 신기하고 뿌듯하다. 아주 완만한 곡선일 테지만 우상향 하는 것은 실력만이 아니다. 부지런히 익혀나가는 동안 수영을 향한 애정도 점점 커져간다.
정오에 시작되는 자유수영을 위해 11시 40분쯤 수영장에 도착한다. 그 시간에 맞춰서 가는 이유는 그때부터 탈의실 락커번호(입장권인 셈) 발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두 대의 키오스크 앞에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엇비슷해 보이는 두 줄 중 어느 쪽에 설 것인가를 두고 매번 고민한다. 사람 수를 일일이 세기는 귀찮고 얼추 눈대중으로 짧은 쪽을 고른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신속하게 버튼을 누르고 신용카드를 꽂으면서 줄이 짧아져 가는 모습이 마치 청군백군 대항전처럼 보일 때도 있다. 아무 연결고리도 소속감도 없이 모인 사람들이지만 나와 같은 줄에 선 사람들을 응원하게 된다. 영차영차.
흥미로운 건, 내가 서는 쪽이 대부분 진다는 사실. 그럴수록 나는 줄 고르기에 집착하게 된다. 오늘도 나와 거의 동시에 들어와 내 옆 줄을 선택한 사람이 나보다 먼저 발권을 했다. 슬쩍 시간을 봐두었는데 내가 발권을 마치고 다시 시계를 보았을 때 고작 1분이 지난 것을 알고 조금 당황했다. 고작 1분 때문에 고민하고 때론 후회했던 거야? 이렇게 내 작고도 소중한 에너지를 낭비해 왔다니.
발권 따위는 애교이고 본격적인 고비는 이제부터다. 바로 샤워다. 정확히 말하면 샤워를 위한 줄 서기. 11시에 시작한 수업이 끝나고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과 12시 자유수영을 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뒤엉키는 그 복잡한 공간에 샤워기가 달랑 30개뿐이라는 사실이 비극의 시작이다. 자유수영의 정원이 120명이고 반 이상이 여성이니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잘못된 구조 때문에 개인들이 갈등에 노출된다. 수업에 때맞춰 들어가기 위해, 빨리 집에 돌아가기 위해, 턱없이 기다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종종 그럴만해서(그래도 되니까), 누군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새치기를 한다. 남의 순서를 가로채고, 자리를 맡아두고, 긴 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때를 미는 이웃을 향한 내 미움은 커져만 간다.
게다가 샤워장은 늘 대화로 시끌시끌하다. 세찬 물줄기의 소음을 뚫고 지극히 사적인 수다를 떨고(아니 저런 얘기를 저렇게 큰 소리로 한다고?) 때밀기 금지라는 안내판 앞에서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그들은, 서로 모든 것을 드러낸 사이라서인지, 스포츠를 함께 배우는 동기사랑의 마음 때문인지 꽤나 끈끈해 보인다. 친구들 무리와 함께 있으면 돌변하는 철없는 중학생들과 겹쳐 보일 때도 있는데 무리 바깥의 사람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례하게 행동하는 경우다. 이미 샤워기를 차지한 지인을 발견하면 줄을 무시하고 가서 둘이서 함께 샤워를 하다가 먼저 시작한 사람이 빠지는 식이거나, 더 황당한 경우는 샤워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이 줄 서 있는 사람들을 스캔해 자신의 지인에게 샤워기를 양도하는 경우이다. 마치 그 샤워기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통은 이미 줄을 선 사람이 사양하는 방식으로 불발에 그치지만.
이런 모습들은 어쩐지 익숙해지지 않고 목격할 때마다 새롭다. 이런 것들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는 너그러움이 내게는 없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인데 내가 피해를 입는 것에도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일 거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하는 성향이 직업으로 더 강화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수영장에 갈 때마다 꼬박꼬박 두 번을 치러야 하는 과정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 발권은 40분에 시작하고, 강좌는 정시부터이고, 샤워기 수는 부족하니 상황을 피할 방법도 없다. 하여 내가 도달한 방법은, 그저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것이다. 수영장 이용을 허락받기 위해 애초에 배정되어 있는, 입장료 4,400원 말고도 반드시 치러야 하는 정신적 비용이라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자비를 베풀라는 가르침보다 이 편이 쉬운 건 내가 자본주의 체제에 몸과 맘이 익은 사람이라서일 것이다. 물건이든 서비스든 값을 치르지 않고는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당연히 받아들인다. 특히 올해 나의 무급 휴직으로 가계 수입이 줄어드니 숨만 쉬어도 돈이 든다는 사실(공과금, 대출이자, 세금)을 실감 중이다. 나를 둘러싼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상품'으로 존재하고 비용 지불은 불가피한데 미처 예상 못한 수영장 이용 비용을 뒤늦게 알아챈 셈이라고 생각하기로 한 거다. 상품 설명글의 맨 끝에 작은 글씨로 적혀있는 ‘부가세 별도’를 담담히 받아들이듯.
전에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회사원의 월급 속에는 상사한테 욕먹는 값도 포함되어 있다고. 욕을 하는 입장이 아니라 욕을 먹고도 참고 회사를 다니는 입장에서 하는 소리였다. 남편의 말대로라면 정신적 보상이 돈으로 환산되어 급여에 반영된 꼴이다. 그러고 보면 물건의 가격에는 재료비나 운송비 말고도 많은 게 포함되어 있다. 샤넬 가방이 천만 원을 넘는 이유가 가죽 값 때문만은 아니듯이. 아무나 갖지 못하는 귀한 것을 나는 갖고 있다는 우월감이나 만족감 같은 것에도 인간은 기꺼이 비싼 값을 치른다.
심지어 인간관계에도 비용은 필요하다. 고부갈등을 호소하던 어떤 여성에게 법륜스님이 주었던 가르침이 생각난다. 남편은 너무 좋은데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은 싫다는 사연자에게 스님은 묻는다. 생선을 좋아하느냐고. 생선을 먹으려면 가시를 조심해 가며 살을 발라야 하지 않느냐, 만일 그 과정이 너무 싫으면 생선 먹기를 포기해야 하지 않느냐. 생선을 먹기 위해 견뎌야 하는 것이 가시인 것처럼, 남편과의 관계를 위해 잘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 시어머니와의 관계라는 비유가 당시 신혼이었던 내게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물건, 서비스, 인간관계를 막론하고 세상에는 거저가 없다. 비용에도 불구하고 대상을 취할지를 선택하는 게 사는 일의 거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지혜를 기른다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 숨은 비용까지도 가늠하면서, 꼭 필요한 비용이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깜냥을 키워나가는 일이렷다. 무질서한 샤워장에서 인류애가 줄어드는 기분을 종종 느끼더라도 나는 가볍게 받아들이겠다. 쾌적한 수영장에서 무려 '자유'수영을 즐기고 싶다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내 몫의 비용을 치르는 중이니까. 삼단고음 대신, "저 여기 줄 서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은 비용 내 포함 사항이다. (20240924)